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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표 낼 자유

삽질 뒤의 자학 그리고…
등록 2014-04-19 16:04 수정 2020-05-03 04:27
한겨레 자료

한겨레 자료

과목별 성적 편차가 너무 컸다. 문·이과, 전공 선택에 별다른 고민이 없었다. 하고 싶은 일도 분명했다. 언론사 입사는 어릴 때부터 꾼 꿈이었다. 학생기자를 한 여파였다. 자기소개서에 종종 미드 주인공 레이첼 이야기를 썼다. 쇼핑을 좋아하는 레이첼은 백화점에서 일하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번다니!” 그런 삶을 꿈꿨다. 면접시험장에서 L 선배가 물었다. “왜 한겨레신문사에서 일하고 싶어요?”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놓친 게 있었다. 원하던 일자리를 얻는 것이 곧, 꿈을 이루는 일이 아님을. 부모 등골 빼먹은 세월을 뒤로하고, 스스로 삶을 그리기 위한 출발점일 뿐이라는 걸.

‘난 누구, 여긴 어디?’ 입사 2년이 다가오던 시점이었다. 수많은 삽질이 지나간 자리엔 자학만이 남았다. 기자로 타고난 사람들이 있다. 외계에서 온 생명체 같았다. 사람 만나는 일마저 두려워지자, 사표를 썼다. 별다른 대책은 없었다. 그런데 사표도 써본 사람이 쓴다고, 도대체 어떻게 쓰는 것이란 말인가. 포털 사이트에 ‘사표 쓰는 법’을 검색했다. 사직서 양식 4종 세트를 무료로 내려받았다. 그때 그 사표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당시 인사 발령이 있었다. 새 부서에 가자마자 사표를 던지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민폐인 듯했다. 2주 뒤, 디데이가 다가왔다. 그런데 이번엔 대형 사건이 터졌다. 일손이 부족한 타 부서에 파견을 가게 됐다. 남의 부서에 사표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써놓은 편지, 다시 보면 손발이 오그라들듯, 써놓은 사표, 다시 보니 후회가 밀려들었다. 하고 싶던 일이었다. 이렇게 그만두면 미련이 남을 것 같았다.

올해 초, 영화 를 보다가 눈물·콧물을 쏟았다. 폐간을 앞둔 에서 16년 동안 포토에디터 일을 해온 월터의 이야기였다. 인쇄매체 종사자이다보니,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지인 K는 이 영화에 공감할 수 없었다고 했다. 직장에서 소속감을 느끼거나, 하는 일에 애정을 품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또 다른 K는 최근 권고사직을 당했다. 회사는 경영이 어렵다며 그에게 자리를 비워달라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일터에 애정을 느끼는 것, 사표를 쓰는 것. 누구에게나 허락된 자유가 아니로구나.

입사 10년차가 코앞인데 아직도 일에 서툴다. 반칠순이 되면 한 분야에서 무언가는 이루었을 줄 알았건만 진로·적성 고민을 하고 있을 줄이야. 얼마 전 만난 정신과 의사 K는 ‘파랑새 증후군’을 의심했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이상만을 추구하는 증상, 터무니없이 높은 목표를 지향해 원하는 것을 이뤄도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무서운 증상이란다. 파랑새를 좇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파랑새가 비빌 둥지를 찾기란 쉽지 않음을 아는 나이. 이러한 고민은 버겁기만 하다. 이래서, 모든 것엔 다 때가 있다고 하는 건가.

AA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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