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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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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뜨고 물먹다

‘나홀로 공격적 취재’의 결말
등록 2013-12-04 14:33 수정 2020-05-03 04:27

‘첫 경험’은 강렬하다. 신문지면에 처음 이름이 올라간 순간도 그랬다. 선배의 채찍을 맞아가며 동기와 함께 완성한 데뷔작은 무려(!) 신문 2면에 게재됐다. 기자가 되면 사회문제를 고발하는 ‘심각’ 아이템을 쓰게 될 줄 알았다. 그런 문제는 내 눈에(만) 쉽게 ‘발굴’되지 않았다. 데뷔작은 ‘애인 대행·연애편지 대필 서비스’ 이야기였다. 우리를 가르치던 ‘싱글’ 남선배가 유독 애착을 보인 ‘명랑’ 아이템이었다.
어쨌든 첫 기명 기사를 쓴 기쁨을 만끽할 틈도 없이 ‘물먹을까’ 노심초사하던 시절이었다. 주변 친구들은 이슈가 된 뉴스를 어느 매체에서 먼저 보도했는지, 전혀 관심이 없다. 나도 기자라고, 남들보다 한발 앞선 ‘단독·특종’ 보도에 대한 열망이 있다. ‘물먹었다’는 탄식은 바로 낙종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기자들은 사무실 대신 담당 출입처로 출근한다. 각 매체에서는 출입처마다 기자 한두 명을 파견한다. 이렇게 모인 선수들이 매일 자신의 이름과 매체명을 걸고 경쟁하는 셈이다. 연차가 쌓일수록 이름의 무게는 점점 무거워진다.
수습 생활에 돌입하기 전 처음 만난 ‘어디 갔어’ ㄱ 선배는 ‘물’이란 건 절대 먹어서는 안 되며 출입처 기자들과는 떨어져 다니면서 공격적인 취재를 해야 한다고 ‘가오’를 잡았다. 그해 ㅇ통신 입사자가 유독 많았다. 혼자 지키고 있던 출입 경찰서엔 두 명이 한꺼번에 출몰했다.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오늘 뭐했냐고 안부를 물었다. 이러한 친절 행보엔 ‘물먹지 않겠다’는 불순한 의도가 반쯤 섞여 있었다.
나홀로 공격적 취재가 늘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파워포인트도 못 다루는 능력으로 근근이 정보기술(IT) 관련 기사를 쓰던 5년 전 어느 날이었다. 출입처 기자들과 함께 일본 도쿄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일정이 거의 마무리되던 날, 도쿄 중심가 긴자에서 점심 식사를 한 뒤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기자들이 모두 같은 이슈를 취재하러 왔으므로, 조금이라도 다른 기사를 쓰기 위해선 보강 취재가 필요했다. 동료 기자들과 떨어져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장렬히 물을 먹었다. 한 무리의 기자들이 방문한 긴자 애플스토어에 하필이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당시엔 삼성전자 전무)이 있었다. 72시간 일본 체류 중 도쿄 한복판에서 경제부 기자들과 마주친 것이다. 이 부회장이 경쟁사인 애플의 아이팟과 맥북 신제품을 들여다보는 모습은 ‘뉴스’가 되기에 충분했다. 이 부회장을 만난 몇몇 기자들은 이 사실을 쉬쉬했다. 눈치는 그때도 별로 없었다. 다음날 아침, 다른 매체에서 내건 [단독] 기사를 통해 비로소 ‘물먹었음’을 깨달았다. 눈 뜨고 물먹은 ‘첫 경험’이었다. 이 부회장과 우연히도 마주치는 일은 지난 5년간 한 번도 없었다.
[단독]에 예민한 기자들의 심리를 잘 아는 제보자들은 ‘낚시’를 하기도 한다. 슬쩍 “다른 매체 J 기자에게 제보했는데 관심을 보이더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보도할 거리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면서도, 귀는 팔랑거린다. 혹시나 무심코 넘긴 문제점은 없었는지. 소심증의 꼬리는 오늘도 이어진다. AA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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