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으나 옷깃만 스쳐간 인연들, 참으로 많다. 휴대전화에 저장된 번호는 많고도 많지만, 선뜻 전화를 걸 수 있는 사람은 한 줌이다. 취재원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직업적 윤리 때문만은 아니다. 초년병 시절, 취재 과정에서 만나게 된 사람들은 주로 40대 아저씨들이었다. 그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취재를 하면서 알게 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친구가 된 경우는 다섯 손가락에 꼽는다. 워드도 다룰 줄 모르면서 정보기술(IT) 분야를 담당하게 됐다. 누구를 만나고, 어떤 기사를 써야 한단 말인가. 멍 때리고만 있을 수 없어 전문지를 뒤적거렸다. 여변호사 K에 대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거대 통신업체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했다는 뉴스였다. 그가 궁금해졌다.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더니, 바로 연결이 됐다. 사무실로 한번 놀러가도 되느냐. 짐짓 쿨하게 물었다. “오호호, 그러세요.” 극히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먼저 만나자 했으니, 점심을 사겠노라 공언했다. 당장 취재할 내용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화는 즐거웠다. 식사를 마친 뒤 계산대에 섰다. 지갑이 없었다. 집에 놓고 온 것이었다. 결국 얻어먹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나라 걱정으로 인한 밤샘 다툼을 거쳐 지금까지 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만나고 싶은 사람들에게 만남을 청할 수 있는 건 행운이다. 그러나 종종 예상과 다른 행보를 목격하는 경우가 있다. 동료 기자 K는 어느 유명 연예인과 인터뷰를 하던 중간에 회사로 돌아와야 했다. 공격적인 질문을 듣던 상대가 갑자기 일어나 사라져버린 탓이다. 진보적 인사로 분류되지만, 성평등 감수성이 바닥인 사람들이 있다. 특히 성희롱엔 좌우가 없다. 그저 손버릇 나쁜 영장류가 존재할 뿐.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공무원들과는 말이 잘 통하지 않을 것이란 선입견이 깨졌다. 주경야독을 해가며 공공의 이익이 무엇인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공무원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스쳐지나간 인연에게 나는 어떤 기자였을까. 2년차 때 일이었다. 어느 기업 대표와 인터뷰가 잡혔다. 홍보대행사가 제안해온 일이었다. 질문지를 요구하기에, 성심성의껏 질문을 생각해 보냈다. 홍보대행사 직원이 급하게 전화를 해왔다. 인터뷰가 취소될 수도 있으니, 취재 방향을 다른 쪽으로 바꿔볼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질문지엔 긍정적 내용보단 부정적 내용이 더 많았다. 불같이 화를 내며 언성을 높였다. 사실 홍보대행사 직원에겐 아무런 결정 권한이 없었다. 그때 그 행동은 그저 약자에게 화풀이를 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인터뷰는 취소됐고,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었다. 사과의 말을 전하지 못했음이 내내 걸린다.
“조만간 꼭 뵙고 인사드릴게요.” 최근 몇 년간 가장 많이 한 말이다. 시간에 쫓긴다는 빌미로, 거짓말이 돼버렸지만. 값진 경험과 시간, 때로는 예민한 정보를 나눠주는 인연들 덕분에 근근이 밥벌이를 하고 있다. 턱밑까지 쌓인 마음의 빚을 생각하면 다시는 진상이 되지 말아야 할 텐데.AA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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