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94. ‘갱’상북도 어느 소도시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이다. “니는 말투가 와 이카노?” 1년 전, 하루 한 번은 듣던 말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에서 내려와 경남 두어 곳을 떠돌며 사투리를 익혔으니, 지역 불명의 사투리를 구사했을 터다. 말 설고 물 선 곳. 외국으로 갔으면, 사투리 대신 외국어 한 자라도 더 배웠겠다며 억울해했다. 그곳엔 쓰레기 오빠야도, 칠봉이도 없었다. 입은 걸어도 마음은 착한 윤진이 같은 소녀들이 바글바글한 여중을 다녔다.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는 ‘중2병’이 찾아들었다. 반항·눈물·침묵 ‘지랄 3종 세트’를 시연한 뒤 방문을 걸어잠갔다. 라디오를 켰다. 애청자였다. 별밤지기 이문세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각 지역 MBC에선 자체적으로 (별밤)를 제작했기 때문이다. 신문을 보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CA(특별활동) 시간. 손발 놀리는 것보단 입 놀리는 게 낫겠다 싶어 시사토론반에 들어갔다. 선생님은 창간 배경을 알려주었다. 이라는 주간지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궁금했다. 그러나 동네 서점에선 구할 수 없었다. 더구나 SBS도 볼 수 없었다. 이듬해 열풍은 전국구가 아니었다. 시골에 살아서 보고 듣고 읽고 싶은 것들을 죄다 놓치는구나, 괜히 서러웠다.
유독 무더웠던 여름, 김일성이 숨졌다. 그 사건으로 엉뚱한 관심사가 생겨버렸다. 육관도사라 불리던 풍수지리가 손석우옹은 김일성의 죽음을 예언했다 하여 화제를 모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학교 도서관에 그의 저서 가 있었다. 중2가 읽기에도 책은 충분히 쉬웠고 흥미진진했다. 지금 불행엔 다 원인이 있었구나, 그렇구나. 위로가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텔레비전을 통해 일제가 우리 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전국 명산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설을 접하게 됐다. 뒷산에 있던 그 말뚝이, 혹시 그 말뚝인가 싶었다.
1997년. 이적의 을 듣게 됐다. SBS도 볼 수 있었다. 입시 준비에 필요하다고 우기자, 부모님은 을 구독시켜주었다. 다시 한번 이사를 한 덕분이다.
1999년. ‘DJ는 자폭하라, 신자유주의 철회하라’ 대학 선배들은 구호를 외치라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간발의 차로 정권 교체가 됐는데, DJ가 자폭하면 어쩌라고. 신자유주의를 나더러 어쩌라고. 몇 해 전, 친구에게 취재 도움을 부탁했다가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됐다. “1997년 외환위기 때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대학 때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었다. 부모처럼 실패하고 싶지 않다.” 20대 초반 우리 집 사정을 드러내는 게 부끄러웠다. 저마다 크고 작은 삶의 짐이 있었을 텐데, 우리는 왜 서로 나누지 못했을까.
스무 해는 바람처럼 빨리 갔다. 매일매일 ‘밥벌이의 더러움’을 체험하고 있는 친구들은 “그때 그 ‘신자유주의’를 막아내야 했다”며 통탄한다. 추억은 힘이 세지만, 완벽한 위로는 되지 못한다. 혹시나 이게 ‘나라 터’를 잘못 쓴 탓일까. AA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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