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이 넘은 우리 할아버지께 모처럼 한나절 남편이 말벗이 돼드린 적이 있다. 등나무 그늘에 앉아 옛 전통에 관해, 또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거 어떻게 보시나에 대해 여쭤보려 했는데, 할아버지는 내내 당신의 20대, 만주에 잠깐 머물렀을 시절에 대해 신나게 말씀했다고 한다. 흥성거리는 거리와 신기한 과일과 여자들의 예쁜 옷차림에 대해. 구십 노인께도, 마음만은 무려 70년 전 20대 시절이 여전히 현재임을 알고 놀라웠다.
노인에게도 젊은 나날이 있었고 그분들도 심지어 한때 아기였다는 사실은 맘먹고 짚어보지 않는 한 잘 연상되지 않는다. 지하철에서 제때 못 내려 낭패를 보고는 도대체 언제부터 이쪽 문이 안 열리고 저쪽 문이 열렸느냐고 시끄럽게 푸념을 하는 할아버지가, 자리에 앉자마자 고개를 휘둘러 푸푸 숨을 내쉬며 쉴 새 없이 ‘아이고 다리야, 아이고 다리야’ 하는 할머니가, 한때는 마을에서 물정 밝은 청년이었고 배시시 미소로 주변을 설레게 하던 처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짐작은 코미디를 넘어 무슨 형벌같이도 느껴진다. 어떻게 세월이 갔는지도 모르는 새 훌쩍 나이를 먹었는데 어느 날부턴가 안 아픈 데가 없고, 남들이 그런 날 늙었다며 무시하고 피한다 싶으면 정말 참으로 쓸쓸한 일일 것이다.
노인들도 속은 젊은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는, 알고 보면 당연한데 늘 잊고 지냈던 얘기를 유쾌하고 통렬하게 해주는 를 봤다. 젊은 몸을 되찾고 신나게 쇼핑을 하면서도 고르는 건 여전히 꽃가라 패션이고 한껏 멋진 액세서리가 겨우 양산인 것도, 1950∼60년대에 젊음을 구가한 여자다워서 흥미로웠다. 패션 취향은 시대 고유의 것을 간직했더라도, 잘생기고 매너 좋은 청년을 보며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또 정말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웠다. 낡고 녹슨 거죽 안에도 저런 감정 작동 기구는 내내 있어왔다는 사실이 놀랍고 서글펐던 이유는, 우리 모두 언젠가 역시 노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훈훈한 마무리를 위해서 희생으로 끝나리라고 짐작은 했지만, 오두리가 멀리 떠나버리기를 간절히 바랐다. 오두리씨, 가세요, 그냥 살고 싶은 대로 사세요, 제발! 아들까지도 이해하고 축복해주는데! 기어코 할머니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착취해먹으며 끝나는 메시지가 처음엔 맘에 안 들었지만, 실은 그거야말로 오말순 여사가 동경해 마지않던 공주님의 선택이기도 했다. 달아날 수도 있지만 달아나지 않는 것. 내 한 몸의 안위와 행복보다 더한 가치가 있다고 평생을 믿어온 마지막 세대에게 바치는 영화의 경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은하 회사원·영화진흥위원회 필자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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