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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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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어설픈 축제의 마지막 날

<국제시장>의 반짝이던 순간
등록 2015-01-07 15:34 수정 2020-05-03 04:27

1959년 성탄 전야, 한 무리의 청년들이 서울 시내 한복판에 모여들었다. 첩첩 촌에서 대학 입학과 함께 처음으로 도 경계를 넘어본 이들. 가난한 집안의 촉망받는 장남들답게 물들인 야전잠바 하나로 온 겨울을 나면서 공부에만 몰두하던 이들에게도 크리스마스는 찾아왔고 며칠 훨씬 전부터 정체 모를 즐거움에 들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의기투합해 종로로 명동으로 진출해서는, 지금 돈으로 1만∼2만원도 채 안 될 얇은 주머니로 음악감상실을 찾아 차 한잔으로 몇 시간씩 버티며 시종일관 큰소리로 떠들었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야야, 지금 종로 쪽은 워떻더냐?” “하이고, 말도 마라. 사람이 참말로 겁나게 많다.” “그냐? 느그덜은 시방 어디서 오는 길이냐?” “아, 우린 쩌그 명동 대호다방에서 오는 길인디?”

사실 아무런 내용도 없는 대화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기밀을 주고받는 양 진지하게 교환하고 우르르 몰려나가 또다시 떠들고 웃으며 거리를 쏘다녔다. 무슨 약속이라도 있는 듯 시간을 서로 자꾸 물으며 바삐 걸었지만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다 길 저쪽에서 오는 한 무리를 만나면 또, “야야, 어디서 오는 길이냐?” “우린 지금 서소문에서 오는데 거기도 참 사람 많다” “그냐? 사람이 그렇게 많더냐?” 하고 다시 한번 중요한 기밀을 교환하고.

남들이 모두 들뜨는 연말연시, 가난한 집안을 일으킬 책임감으로 오로지 공부에 매달리느라 여학생 단발머리 아래 솜털이 어떻게 생겼는지 제대로 쳐다본 적도 없던 이 시골 청년들은 평소의 수줍음과 열없음을 세와 분위기로 극복하고는 세련된 서울 청년들만의 영토 같았던 시내를 접수하고 돌아다니며 해방감과 야릇한 기대감을 만끽했다. 결국 자취방에 돌아오면 남은 것은 그나마 더 얄팍해진 주머니와 꽁꽁 동태가 된 몸뿐이지만 평생 잊을 수 없을 들뜨고 즐거운 성탄이었다. 그러나 이 어설픈 축제도 그것으로 마지막이 됐다. 1959년 겨울, 가슴 뿌듯했던 크리스마스를 보낸 이 청년들은 다음해에 4·19를, 그 다음해에 5·16을 맞았고 가혹한 유신체제와 군사독재하에 산업 역군으로 1970∼80년대를 보내다가 1990년대에 밖으로 밀려나 이제는 다시 어려워진 경제의 백세시대 노인이라는 눈총까지 받고 있다.

‘아버지께 드리는 송가’라는 영어 제목을 단 ,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파티 장면에서 나는 눈물이 쏟아졌다. 가난한 장남·장녀들로 어깨 가득히 책임감을 진 채 힘겨운 노동에 시달리던 이들이 이 순간만큼은 스물 몇 살 젊음 그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그 어떤 신산스러운 삶에도 존재했던 그 반짝이는 순간들. 역사의 가장 힘든 틈바구니에서 태어나 오로지 거름으로만 살았지만 그런 그들에게조차 존재했던 푸르른 순간을 향해 축배를 들고 싶었다.

오은하 직장인·영화진흥위원회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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