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반둥회의 60주년 기념행사에 출장을 갔다가 인도네시아 현지의 귀여운 여대생을 알게 됐다. 엄청난 한류 덕에 이 아가씨는 드라마 시청을 통해 한국어를 배웠다는 재주를 자랑했는데, 일행을 ‘언니’ ‘오빠’ 등으로 부르다가 날 보고는 잠시 갸웃하더니 ‘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아줌마’가 다소 터부시되는 호칭이란 걸 알고 있는 건 제법이었지만, 그래도 엄마라니! 스물여덟 살 차이면 엄마가 못 될 것도 없고 내 친구들 중엔 실제 대학생 엄마도 군인 엄마도 있지만, 아무리 비즈니스 정장을 차려입고 외국인의 커튼을 쳐도 ‘엄마 나이’가 여과 없이 그대로 보인다는 건 뜨끔한 기분이었다.
그러다 며칠 전엔 유럽 작은 도시의 시의원을 만날 일이 있었는데, 내 아들처럼 고등학생이었다. 우리 아이가 포대기에 싸여 예방접종 받을 때 같이 아기였던 학생이랑 정치와 인권을 논하고 있자니 정말 만감이 교차했다. 하긴 씨스타 효린양 어머니도 샤이니 종현군 어머니도 다 내 또래 아닌가 말이다.
나에게 거울이란 머리 빗을 때와 립스틱 바를 때만 보는 것인지라 하루 중 대개는 기껏해야 서른 살 기분으로 보내다가 남들 눈에 비치는 실제의 나를 어쩌다 우연히 찍힌 사진 등으로 확인하면, 야 진짜 이제 나는 그냥 배경 가구일 뿐이로구나 절감하게 된다. 방에 몇 명이 있든 한 덩어리로만 보이지 전혀 분간이 안 되던 바로 그, 장년층 그룹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종종 자각의 기회를 맞음에도 불구하고, 또래 여배우의 나이듦을 목격하는 건 또 다른 종류의 감정이었다. 김혜수가 엄마라니! 고현정도 오연수도 심지어는 김희선도 실제로 엄마긴 하지만 작품 속에서 김혜수가 엄마라니, 쳐다만 봐도 빛이 나던 천하의 무비스타 김혜수가! 그것도 어린 아기 엄마도 아니고, 한 세대와 다음 세대의 교체를 의미하는 그런 상징적 거물 엄마 역은 김혜자님이나 윤여정님이 맡는 거 아니냐고요!
더 충격적인 건 근데 그 역할이 어울리더란 거고, 딸인 일영(김고은)의 엄마가 되기에 전혀 부족함 없는 연륜이라는 거였다. 조금도 어리거나 모자라 보이지 않는 꽉 찬 카리스마로 스크린을 채우는 김고은, 그런 온전한 성인의 등극을 돕는, 말하자면 ‘보조자’ 역할이 김혜수에게 어울렸던 것이다. 여왕 중의 여왕 김혜수가 그렇다니, 이제 우리 세대는 통째로, 더 이상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인증을 받은 것만 같았다.
얼마 전 입사한 옆자리 아가씨도 나보다 스무 살 아래다. 세대지도에서 이젠 진짜로 내 위치를 파악하고, 의 엄마처럼, 하시라도 내 자리를 뺏길 수 있음을, 실은 이미 대략 뺏겼음을 인정하고 살아야 하는 거다. 아아, 제대로 앉아본 적도 없는데 어느새 내줘야 하다니, 내 인생은 시작도 안 한 줄 알았는데 그냥 이렇게 가는 거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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