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훌륭한 재능과 실력이 꼭 훌륭한 인격에 깃드는 것은 아니다. 이건 생각해볼수록 이상하다. 재능이야 랜덤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그걸 깊이 있게 탐구하고 자신을 연마하는 것은 그게 아무리 스스로를 위한 “이기적인” 거라도 최소한의 진실성과 통찰력이 수반돼야 하지 않나? 스스로에 대한 성실함이란 결국 인간에 대한 보편적 진리도 배우게 하는 미덕 아닌가? 그건 그 사람의 어떤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순수하고 착하게 남아 있어야 가능한 거 아닌가? 그런데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어느 조직엔들 없겠는가마는 유학을 하다보면 더럽게 걸리는 늪 같은 케이스들이 있다. 저서와 연구는 더없이 훌륭했고 학회에서 강연할 때도 홀랑 반할 정도로 매력적이었고 오피스에서 일대일로 만날 때까지도 괜찮았는데, 지도교수로 모시기로 하고 사인을 한 순간부터 표변하는 교수들이 있었다. 다 큰 어른들이 더군다나 그리도 강인해 보이던 미국 여자애들이 엉엉 우는 모습도 심심찮게 목격됐다. 대학원생들을 지배하는 권력을 학문 외적으로도 누려보려는 유치한 모습은 여러 명에게서 봤지만, 도대체 어떻게 맞추고 숙여도 길이 안 보여 “나는 진짜 쓰레기야”(I’m just a piece of dirt)라고 탄식하며 학생들로 하여금 학교를 떠나게 하는 교수를 몇몇 보았다. 아무리 시스템이 합리적이라고 해봤자 학계는 도제관계고, 이유가 뭐가 됐든 지도교수가 나를 찍어놓고 공격한다면 어떻게 길이 없는 것이다.
의 플레처도 바로 그런 선생이다. ‘너 지금 나보다 못났지?’ 하고 조롱하며 기쁨과 우월감을 느끼는, 아주 덜 자란 어른. 학생은 이끌어줘야 할 미완의 원석이라기보다는 어쨌든 현재의 나보다 못한 루저일 뿐이다. 목숨을 끊은 한 유망한 졸업생을 진심으로 애도하는 듯하지만, 그의 자살에 원인을 제공한 사람 역시 플레처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를 한 사이코 천재의 폭주기 이상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제자인 앤드루의 존재다. 앤드루는 처음엔 수줍고 여려 보이지만, 실은 또 한 명의 플레처 같은 자다. 그 빼어난 재능과 열정 때문만은 아니다. 둘이 빚는 힘의 자기장 안에서, 스승은 능멸하고 제자는 속이고, 선생은 학대하고 학생은 배신한다. 서로를 진검 승부로 쓰러뜨리려는 그들의 분투는 무대 위에서조차 상대를 속이고 짓밟아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게 하려는 개싸움 수준으로 이어진다. 음악 대결이 아니라 거의 액션활극 같은 정말 기괴하고도 신선한 이 열정은 일종의 경외감까지 불러일으킨다. 그래, 나는 쓰레긴지도 몰라, 정말 철저히 망가졌을 거야. 그래도 너만은 이기고 싶어, 너만은 파괴하고 싶어, 왜냐면 내가 너보다 잘하거든, 진짜 최고는 나야. 이전투구의 아수라장 속에서도 이 순수한 염원만큼은 손상되지 않고 재현된다. 그때 미국에서 그 교수들도 진정한 라이벌을 학생 중에 만났다면 그들 인생은 달라졌을까.
오은하 직장인·영화진흥위원회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