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자기최면이다.
5년이 차가도록 그는 변하지 않았다. 자기최면은 더욱 강고해져서 하나의 신념체계로 자리잡은 듯하다. 자기최면이 신념이 될 때 신념을 가장한 책임 회피는 또 다른 비극을 부를 수 있다. ‘그들의 죽음은 그들의 책임’이란 자기최면은 법 집행자로서 가장 위험한 ‘유사 신념’이다.
망루를 태우고 사람을 태운 경찰 지휘관이 한국공항공사 사장이 된 지 한 달이 지났다. 서울 용산 망루에서 죽은 철거민의 유족들도 경기도 김포의 ‘땅 망루’에서 한 달을 살았다. 유족들의 출근 저지로 취임식조차 제때 열지 못했던 김석기 사장이 취임 한 달 만에 연 기자회견이 유족들을 분노케 했다.
김 사장은 11월5일 말했다. “적절한 기회에 유가족을 만나서 애도의 마음과 위로를 표할 생각이 있다. …유족들에게는 머리를 숙이겠지만 경찰이 법 집행을 잘못했다는 것은 사과할 수 없다.” 김 사장이 늘 해오던 주장이다. 사고 당시 “무전기를 꺼놨다”며 지휘 책임을 떠넘겼던 행태의 반복이기도 하다.
책임 회피는 언어와 행동의 불일치를 동반한다. 김 사장은 유족들을 만날 생각이 있다고 했으나, 사장 임명 뒤 매일 공항공사를 찾아 만남을 요구하는 유족들을 용역을 동원해 강제로 끌어내고 있다. 취임 전엔 공사 출입은 가능했으나, 취임 뒤부턴 출입문 접근도 차단당하고 있다. 최근 김 사장은 유가족과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을 상대로 법원에 공항공사 출입금지 가처분(위반 건당 300만원)까지 신청했다.
경찰 내에선 김 사장을 여전히 아까운 인물로 보는 의견이 적지 않다. 2009년 1월 경찰청장으로 내정되자마자 터진 용산 참사로 안타깝게 물러났다는 시각이다. 권위적이지 않고, 하위직 경찰의 권익 향상에 힘쓰며, 경찰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지휘관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당시 진압은 불가피했다는 그의 주장에 공감하는 정서들이라고 할 수 있다.
고위 공직자는 판단의 옳고 그름보다 판단의 결과에 따라 책임지는 자리다. 경찰 시절 주로 외사 쪽에서 전문성을 쌓아온 김 사장이 경비 업무의 전문성 부족으로 사고를 불렀다는 지적은 경찰 내에서도 있었다. 철거민과 경찰을 포함해 6명을 죽인 판단이 정당했다는 강변은 책임을 피하려는 자기최면에 가깝다. 자기최면이 책임 회피목적을 넘어 신념의 단계로까지 발전했다면 공포스럽다. 진압의 판단이 옳으면 결과는 상관없다는 신념이 낳을 결과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김 사장은 경찰청장에서 낙마한 뒤 4개월 만에 한국자유총연맹 부총재 자리에 앉았다. 이명박 정부 말기엔 오사카 총영사관 총영사로 발탁됐다. 지난해 총선 때 새누리당에 입당해 국회 진출을 꿈꿨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에서 공항공사 사장으로 부활했다. 3배수 후보 중 최저 점수를 받고도 사장으로 임명됐다. 영남대를 졸업하고 객원교수로 재직한 이력이 영남대 이사장을 역임한 박 대통령과의 관계를 의심케 했다. 최근엔 그가 박 대통령의 후보 시절 외곽 조직이던 ‘포럼 오늘과 미래’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나의 판단은 옳다’는 자기최면의 신념화는 박 대통령과도 닮았다. 박 대통령에게 검찰 수사로 드러난 국가정보원·국방부의 대선 개입 결과는 중요치 않다. ‘나는 무관하다’는 신념의 한마디면 족하다. 끊임없이 내부의 적을 창조해 위기를 벗어나는 ‘통치 공학’도 용산 철거민들을 폭도로 규정해 ‘살인 진압’을 정당화하는 김 사장의 논법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유족들은 김 사장 퇴진 집중투쟁을 시작했다. 세우지도 못한 망루는 더 슬프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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