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꼼히 골라온 말들인 듯했다.
시작은 프랑스 소설가 기욤 뮈소를 인용한 문장이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은 아직 우리가 살지 않은 날들이다.” 다음엔 고마운 사람들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배역을 맡겨준 드라마작가와 연출가, 동료 배우들, 가족과 친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잠시 머뭇했고,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공공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요즘 따라 애쓰고 있는 아버지들이 많이 계십니다. 노동자 최상남을 연기한 배우로서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힘내십시오.”
배우 한주완은 ‘2013 KBS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남자신인상을 받았다. 그는 주말드라마 에서 ‘최상남’ 역을 연기하고 있다. 그의 수상 소감에 시상식장은 환호했다.
방송을 본 적지 않은 사람들이 ‘울컥’했다. 그가 ‘아버지’라고 칭한 이들이 민영화 반대 파업을 벌여온 철도노동자들이란 사실을 알아듣지 못할 사람은 없었다. 시상식이 있던 12월31일은 전날 파업을 철회한 철도노조가 현장으로 복귀한 날이다.
한주완은 1984년 1월에 태어나 서울예대에서 연극을 공부했다. 그는 방송에선 막 꽃피기 시작한 신인이지만, 독립영화 쪽에선 이미 주목받는 배우였다. 스물다섯 살 늦은 신입생으로 연기를 시작한 그는 (2009), (2010), (2012), (2013) 등의 작품에 출연했다. ‘홍대 여신’으로 불리는 가수 한희정이 그의 누나다. 수상 소감을 접한 한희정은 트위터로 “멋있다”며 동생을 격려했다.
한주완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발자국을 보면 수상 소감이 돌출 발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시상식이 있기 전인 12월10일 “부패한 권력은 모든 것을 민영화한다”는 노엄 촘스키의 말을 트위터에 올렸다. 12월13일엔 수천 명의 파업 노동자들을 직위해제한 최연혜 코레일 사장 비판 글을 리트위트 했고, 10월4일엔 송전탑 공사를 반대하며 목숨을 끊은 경남 밀양 주민의 소식을 리트위트 했다.
젊고 예쁘고 잘생긴 배우들이 시상식 마이크를 빌려 사회성 짙은 소신 발언을 한 일이 처음은 아니다. 한주완의 발언이 준 느꺼움은 그가 의식적으로 선택한 언어 때문이었을 듯싶다. 그는 ‘노동자 최상남’을 연기한 배우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극중에서 최상남은 중졸의 중장비 기사다.
노동자. 지극히 평범한 보통명사면서도 때와 장소에 따라 고유명사로 금기시되는 단어. 기름을 묻히며 기계를 만지는 노동자 배역을 빌려, 공공성을 지키려 중징계를 각오한 철도노동자들과의 거리를 좁혀낸 그의 발언에, 사람들은 뭉클했을 것이다. 촉망받는 연기자가 공영방송의 기능을 잃어버린 KBS 전파에 실어 타전한 그 단어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음습한 공기와 접속하며 만든 촉촉함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2013년 연말은 그 노동자들이 정권과 언론의 쇠망치에 사정없이 내려찍히는 살 에이는 겨울이었으므로.
그의 수상 소감을 들은 시인 서효인은 자신의 트위터에 이런 글을 남겼다. “연기자 한주완. 예전 와우북페스티벌에 문지(문학과지성사) 부스에 와서 책을 여러 권 사갔다. (구입한 책 중엔) 좀처럼 읽기 힘든 인문서도 있었다. 오늘 그의 신인상 수상 소감을 듣자니 어쩐지 책의 힘을 더욱 믿게 된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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