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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학점제, ‘내신등급’ 앞에서 ‘선택’은 불가능했다

과목 선택권 유명무실… 선택과목 개설 수 등 지역·도농 간 ‘교육 불평등’ 위험수위
등록 2026-04-23 20:32 수정 2026-04-29 10:01
고교학점제가 전면 시행된 지 1년이 지났지만 교육 현장의 혼란은 계속되고 있다. 학생들은 현행 대입제도 앞에서 ‘과목 선택권’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자율형사립고 학생들은 자퇴를 고민한다. 고교학점제는 지역별 ‘교육 불평등’을 가속화하는 주범으로까지 낙인찍혔다. 지난 3월24일 반포고 3학년 학생들이 전국연합학력평가를 치르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고교학점제가 전면 시행된 지 1년이 지났지만 교육 현장의 혼란은 계속되고 있다. 학생들은 현행 대입제도 앞에서 ‘과목 선택권’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자율형사립고 학생들은 자퇴를 고민한다. 고교학점제는 지역별 ‘교육 불평등’을 가속화하는 주범으로까지 낙인찍혔다. 지난 3월24일 반포고 3학년 학생들이 전국연합학력평가를 치르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제 맘대로 과목 선택을 한다고요? 입시 때문에 절대 할 수 없어요. 수강생이 많은 과목이 선호 1순위예요. 내신에 유리하거든요. 신청자가 적으면 정말 내신 1등급 올리기 힘들어요.”

2025년 고등학교에 입학한 김아무개군(서울 시내 일반고 2학년)은 고교학점제 시행에도 진로와 적성에 맞춰 원하는 과목을 선택해 수강하는 학생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내신이 5등급제로 완화됐지만, 상위권 내신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고교학점제 시행 1년, 학교 현장의 모습은 어떨까.

최우성 경기 이천 다산고 교장은 1~2학년 학생과 교사들의 혼란이 현재진행형이고, 여기에 더해 예상치 못한 여러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애초 취지로 내세웠던 ‘과목 선택권 확대’는 상대평가 유지, 그에 따른 점수 경쟁으로 유명무실됐다고도 했다. “학부모들은 ‘내신등급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을까?’ ‘학생의 선택권이 학교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보장되는가?’ 같은 본질적인 불안을 안고 계세요. 제도의 취지는 좋으나, 이를 뒷받침할 현장의 여건이 충분치 않아 교장으로서 고민이 깊어요.”

 

상대평가·무전공 선발 확대의 그림자

 

경북 소재 일반고 교사 ㄱ씨의 고교학점제 평가도 최 교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내신을 잘 받아야 하는’ 학생들로서는 적성과 진로보다 ‘점수를 잘 받을 수 있는’ 과목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우리 학교만 해도 수강생이 많은 과목, 사회탐구 등 상대적으로 쉬운 수능(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 범위 과목으로의 쏠림, 이로 인한 양극화가 심각하다”며 “그러나 상대적으로 어려운 과학탐구나 심화 과목은 신청자가 전무하다시피 해 폐강하는 일이 발생한다”고 말했다.

고교학점제는 문재인 정부의 교육 공약 1호로, 학생들이 진로와 적성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고 이수 기준에 도달하면 학점을 취득하는 제도다. 애초 내신과 수능의 ‘절대평가(9등급)’를 전제로 설계됐다. 시행 전 여러 해 시범사업을 거쳤음에도 전면 확대 초기부터 표류하는 이유는 고교학점제의 핵심인 ‘절대평가제’를 폐기한 데서 비롯된다. 2023년 윤석열 정부는 고교학점제를 2025년부터 전면 도입하되, 고교 선택과목까지 상대평가를 유지하기로 발표했다. 교과과정과 입시제도의 엇박자, 이로 인한 현장의 혼란은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이한섭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정책실장은 “학생들의 선택권을 넓혀주자는 취지이지만, 상대평가를 유지한 탓에 고교학점제의 실상은 내신을 잘 받을 수 있는 과목, 진학 희망 대학에서 권장하는 과목을 선택하는 비정상적 구조로 전락했다”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가 추진한 대학의 자유전공·무전공 선발 확대는 미완의 고교학점제, 그리고 그 엇박자에 기름을 부었다. 이 정책은 고등학교에서 대학 전공 연계 과목으로 선택과목을 수강하지 않아도 입시에 불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시그널로 읽혔다. 학생들은 대학의 무전공 선발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특정 학과 전공과 연계된 선택과목 수강이 무의미하다는 걸 간파했다. 서울 일반고 2학년 이아무개양은 “2학년 때 듣는 선택과목은 진학 희망 대학의 권장 과목이 아니면 굳이 들을 이유가 없다”며 “부족한 잠을 자거나, 다른 공부를 할 때도 종종 있다”고 고백했다.

고교학점제는 학생들의 선택권을 넓혀주자는 취지이지만, 상대평가를 유지한 탓에 실상은 내신을 잘 받을 수 있는 과목, 진학 희망 대학에서 권장하는 과목을 선택하는 비정상적 구조로 전락했다. 클립아트코리아

고교학점제는 학생들의 선택권을 넓혀주자는 취지이지만, 상대평가를 유지한 탓에 실상은 내신을 잘 받을 수 있는 과목, 진학 희망 대학에서 권장하는 과목을 선택하는 비정상적 구조로 전락했다. 클립아트코리아


 

자퇴생 늘고, 교우관계 끊어지고

 

한국교육개발원(KEDI)이 최근 발표한 ‘고교학점제 전면 허용 1년차’를 분석한 보고서에는 고교학점제 이후 학교 안팎의 혼란과 드러난 문제점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보고서는 자신의 진로와 학습을 주도적으로 탐색하고 설계하도록 한 고교학점제의 과목 선택권이라는 ‘이상’이 대학입시라는 ‘현실’에 가로막혀 목적이 훼손됐다고 분석했다. 학생들은 김군이나 이양처럼 과목 선택시 흥미나 적성보다 수강 인원, 대학 권장 과목, 수능 과목 여부 등 대입 유불리를 우선 고려했다.

보고서는 고교학점제 취지를 살리기 위한 대안으로 대입제도 개편을 주문했다. ‘2028년 대입 개편안’이 고교학점제의 취지를 퇴색시킨다는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 2023년 윤석열 정부는 2028학년도 수능부터 통합사회·통합과학 등 통합형으로 출제한다고 밝혔다. ‘정시 올인’처럼 수능 중심으로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은 굳이 2~3학년 때 사회계열과 과학계열 선택과목을 수강할 필요가 없어졌다. ㄱ교사는 “사회계열과 과학계열 선택과목의 경우 수능을 준비하는 학생들까지 고려해 1학년 통합사회와 통합과학 범위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부실과 파행 수업이 진행되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자율형사립고(자사고)·특수목적고(특목고) 학생들에게 고교학점제는 자퇴를 부추기는 기폭제로 작용했다. 내신 5등급제에서는 상위권 학생들이 몰린 학교에서의 성적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서울 자사고 2학년 박아무개(18)군은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에 자퇴를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중학교 때까지 성적이 최상위권이었던 박군의 목표는 서울대 이공계열 진학이다. 하지만 2.5등급대 내신으로는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는커녕 인서울(서울에 있는 대학) 도전도 불가능하다. “적어도 1등급대여야 수시로 서울·수도권을 노려볼 수 있어요. 정시로 눈을 돌려야 하는데, 수능에도 나오지 않는 2~3학년 선택과목들을 학교에서 들으며 시간을 낭비하는 게 아까워요.”

경기 소재 특목고 2학교 최아무개(18)양도 자퇴를 고민하는 건 마찬가지다. 성적 스트레스에다 친구도 없어 학교생활이 너무 힘들고 외롭다. 그나마 1학년 때는 하루 대부분을 교실에서 보내 반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절반 가까이 이동수업으로 진행되는 2학년이 되어서는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반 친구들도 아직은 서먹해요. 교실을 옮겨 다니느라 쉬는 시간에 수다 떨 여유도 없어요.”

자사고 학생들의 자퇴 증가는 수치로도 확인된다. 2026년 2월 ‘학교알리미’(www.schoolinfo.go.kr) 공시를 보면 서울 소재 15개 자사고에서 2024년 다른 학교로 전학 가거나 학업을 중단한 1학년은 총 356명이었다. 치열한 내신 경쟁을 경험한 학생들이 빠르게 일반고 전학이나 검정고시를 선택한 것이다. 최우성 교장은 “체감하는 자퇴생 증가 추세는 뚜렷하다”며 “고교학점제가 오히려 공교육 이탈을 가속화하는 것은 아닌지 교육 당국은 심각하게 되짚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농산어촌 지역 학생들 박탈감 어쩌나

 

최근 고교학점제는 ‘지역 및 학교 간 격차’ ‘교육 불평등 확대’의 주범으로까지 낙인찍혔다. 공교육 정상화에 역행하는 것은 물론 도시와 농촌 간 학업 수준 격차, 이로 인한 대입 기회의 불평등까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온다.

한국교육개발원도 보고서에서 지역 및 학교 간 격차를 가장 큰 쟁점으로 지적했다. 농산어촌 지역, 특히 소규모 학교의 경우 소수의 교사만으로 학교가 운영되면서 과목 개설 자체부터 난관에 부딪히는 경우가 허다하다. ‘학교알리미’에 올라온 지역별·학교별 선택과목 개설 수를 찾아 비교한 결과에서도 그 격차를 찾아볼 수 있다. 정원 1천 명 수준인 서울 자사고의 경우 교사 80~90명을 확보한 탓에 대체로 1학기에 15~20개의 선택과목을 개설했다. 반면 강원·충청 등 지역의 몇몇 일반고는 1학기 선택과목 개설 수가 5~10개에 그쳤다. 학생과 교사의 수가 적다보니 다양한 과목을 개설하는 것 자체가 역부족이다.

익명을 요구한 경상도의 한 학부모는 다양한 과목 개설이 불가능한 현실과 별개로, 원하는 과목을 선택하더라도 수강생이 적거나 가르칠 교사가 없다면 다른 학교로 이동해야 하는 현실을 개탄했다. “도시와 농촌은 물론 같은 지역 내에서도 학교 규모에 따라 과목 선택 기회가 달라질 수 있는데, 상대적으로 불리한 학생들은 좌절과 박탈감을 느낄 거예요. 입시 격차로까지 확대될 게 뻔하잖아요.”

최우성 교장도 이 점을 가장 우려한다. “내신등급 따기 쉬운 학년당 10학급 이상의 대규모 학교로 학생이 쏠리면서 예를 들어, 다산고처럼 학년당 4개 학급인 소·중규모 학교는 지역에서 기피 학교로 낙인찍히는 위기를 맞고 있다”며 “학생들이 지원을 꺼릴 경우 소·중규모 학교는 향후 폐교 위기로까지 몰릴 수 있다”고 씁쓸해했다.

 

고교학점제가 전면 시행된 지 1년이 지났지만 교육 현장의 혼란은 계속되고 있다. 학생들은 현행 대입제도 앞에서 ‘과목 선택권‘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자율형사립고 학생들은 자퇴를 고민한다. 고교학점제는 지역별 ‘교육 불평등’을 가속화하는 주범으로까지 낙인찍혔다. 지난 3월24일 금천고 3학년 학생들이 전국연합학력평가를 치르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고교학점제가 전면 시행된 지 1년이 지났지만 교육 현장의 혼란은 계속되고 있다. 학생들은 현행 대입제도 앞에서 ‘과목 선택권‘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자율형사립고 학생들은 자퇴를 고민한다. 고교학점제는 지역별 ‘교육 불평등’을 가속화하는 주범으로까지 낙인찍혔다. 지난 3월24일 금천고 3학년 학생들이 전국연합학력평가를 치르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현실’을 ‘이상’으로 만들 뾰족한 수

 

교육부는 이런 불균형과 격차를 해소할 방안으로 공동교육과정과 온라인학교 확대를 내걸었다. 지난 1월에는 공동교육과정 등에 교원 777명을 2026년 배치하고, 소규모 학교 학생이 다양한 과목을 수강하도록 강사 채용 예산 157억원을 지원하는 등 지역별 격차를 줄여나가겠다는 방침도 밝혔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도시와 달리 농산어촌 지역에선 (타 학교 인원 30% 포함 등) 개설 기준 미충족의 이유로 수강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전국 2378개 고교 중 81개교(3.4%)에서만 기본수학·기본영어를 개설한 데서 보듯, 학업 성취 수준이 낮거나 느린 학습자를 위한 과목 개설 확대도 뒤따라야 한다.

이한섭 전교조 정책실장은 “고교학점제가 특정 지역, 특정 규모 학교에 유리한 제도라는 것이 점점 드러나고 있다”며 “고교학점제가 오히려 지역 소멸을 가속하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희정 교사노동조합연맹(교사노조) 대변인은 “헛구호에 그친 과목 선택권, 지역별·규모별 교육 격차 심화 등 고교학점제 문제점들이 지속해서 발생한다면 보완책을 마련한다고 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에 불과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개선책은 없을까. 현재까지는 보완 뒤 유지와 폐지 의견이 팽팽하게 나뉜다. 이한섭 정책실장은 “내신 절대평가, 수능 자격고사화 등 개선 대책과 더불어 고교 정상화 조치가 요구된다”고 했다. 장승혁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대변인은 “과목 선택권 확대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2만여 명 수준의 교사 확충이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김희정 교사노조 대변인은 “고교학점제 아래서는 대입과 고교 교육 정상화는 불가능하다고 본다”며 “문제가 끊임없이 발생한다면 결국엔 폐지 수순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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