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잠을 이겨가며 박지성을 연호하던 행복한 주말도 이제는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겨졌다. 그는 단호했다. 이제는 떠나야 할 때라고 말했다. 마치 마지막 순간 일생의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는 백조처럼 박지성에게는 이별도 축제였다. 박지성이 부르는 백조의 노래는 한 시대의 끝을 고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다.
박지성은 특출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외곬이 돼야 했다. 박지성은 “사람들은 나보고 완벽주의자라고 부르지만 내게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수많은 편견과 싸워야 했다. 명지대 시절 올림픽 대표가 됐을 때는 허정무 감독이 김희태 명지대 감독과의 친분 때문에 발탁했다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했을 때는 ‘티셔츠를 팔러 온 사나이’라는 굴욕도 맛봤다. 편견을 끝내 이겨냈다.
욕심보다 자신을 버리는 법을 택했다. 헌신했다. 그는 자서전 에서 “내 안에 변화되지 않는 모습들로 절망하고 있다면 비우고 버리시기를 권한다. 버리는 것이야말로 더 큰 나를 위해 망설임 없이 달려갈 힘이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나를 버리는 것’은 이겨냄이었다. 패했다고 해도, 실수를 범했다고 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단단하고 파괴할 수 없는 정신력. 그는 이걸 두고 ‘위닝 멘털리티’(winning mentality)라고 불렀다. 세류초 6학년 때 대회에서 진 뒤 눈물을 쏟고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그 순간이 위닝 멘털리티의 출발점이었다.
박지성은 최고를 꿈꿨지만 1인자를 지향하지 않았다. 그는 11명 속에서 승리를 얻어오는 데 쓸모 있는 팀원이 되고 싶었고, 어우러지기를 원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이름 없는 영웅’으로 불렸다.
박지성이 걸으면 길이 됐다. 사상 최연소 주장으로 출전한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서는 아시아 최초로 월드컵 3개 대회 연속 골을 기록했다. 아시아인 최초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첫 본선 골과 첫 우승도 그의 몫이었다.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최초’ ‘최고’의 수식어가 붙었다.
기록만으로 박지성을 설명할 수는 없다. ‘박지성 현상’은 한국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평범했던 선수가 오로지 성실과 배려, 헌신을 무기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스토리는 변칙과 편법이 만연한 사회에 정도(正道)를 일깨웠다. “달리기가 느리더라도, 키가 작더라도, 몸이 왜소하더라도 축구장 안에서 누가 잘할지는 아무도 모른다”면서 희망을 전파했다. “결국 성취는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 세운 목표를 향해 얼마나 꾸준히 걸어가느냐에 달렸다”는 말로 일상의 치열함을 강조했다.
2000년 7월 첫 일본 출장길. 길을 잃고 헤매다 자정 무렵에야 도착한 필자에게 싫은 내색 없이 인터뷰를 해주던 여드름투성이 박지성이 떠오른다.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엔트리 탈락 1순위’라는 여론에 힘겨워하던 모습도 선하다. 리오넬 메시를 완벽하게 제압하고도 평정심을 유지하던 2008년 5월 맨체스터에서의 만남도 기억난다.
부드러우면서 ‘주머니 안의 송곳’ 같은 강함이 느껴졌다. 훌륭한 축구선수 이전에 훌륭한 인간이었다. 그래서 필드에서 그를 더이상 볼 수 없다는 것에 가슴이 더 먹먹해져오는지 모르겠다.
아쉬움이 지워지지 않지만 분명히 박지성 시대는 끝났다. 10년만 지나도 어린아이들은 “아빠, 박지성이 누구야?”라고 물을 것이다. 그럼에도 박지성의 성공 DNA는 유효하다. 자신의 약점을 숨기지 않고,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최고의 성과를 낸 박지성이 남긴 유산은 미래 국가대표들의 표준이자 대한민국 사회의 지침이다.
박지성은 대한민국을 위해 좀더 건설적인 역할을 맡고 싶다고 했다. 인간 박지성을 응원한다. 그리고 위대한 캡틴을 향해 ‘박지성과 함께한 24년, 대한민국은 행복했다’는 헌사를 남긴다. Good bye 캡틴, Thank you 지성.
최원창 전 기자·현 수원삼성블루윙즈 홈경기운영팀장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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