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운동 당시에 존경을 받았던 인물은 많다. 그러나 민주화운동 이후에도 온전히 존경받을 만한 인생을 살았던 민주화운동 세대는 지극히 드물다. 박현채, 김남주 그리고 윤한봉. 민주화운동을 넘어서려 했던 민주화운동 이후 세대가 복잡한 심사 없이 그저 ‘존경’을 바칠 수 있었던 드문 이름이다. 그들은 지역주의로 오염되기 전 ‘광주의 아들’이란 말에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초지일관 살았다.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암덩어리 같은 세상에서 암덩어리 하나씩 가슴에 품고 그들은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고’(故)라는 단어를 그들의 이름 앞에 붙여야 할 순간에 나의 손가락은 저항한다.
오직 망명자만이 그들의 초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프랑스 파리의 홍세화, 미국의 윤한봉. 청춘의 망명객이 중·장년의 사내가 되어 돌아온 조국은 낭만적이지 않았다. 기성세대가 된 옛 동지들은 정치인, 교수, 이사장이 되어 그들을 맞았다. 그들이 부재한 가운데, 한국 사회는 친구들의 푸른 꿈을 적당히 ‘먹어’버렸다. 살려면 연줄을 놓을 수 없고, 정치를 하려면 타협도 해야 하고…. 이역만리에서 그들만 나이를 먹지 않고 있었다. 청춘의 원본을 유지한 그들의 꿈은 그리던 조국에서 현실의 논리에 포위당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 그는 소문 같은 존재였다. 그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말하는 것조차 금기였다. 그에게 걸린 현상금 5천만원. 전두환 군부가 내건 거액은 그가 1980년 광주에서 어떤 존재였는지 역설로 증명했다. 미국으로 밀항했다고 했다. 화물선 레오파드호에 숨어서 35일을 빗물로 연명했다. 미국에서 청년학교를 만들고, 민주화운동 조직을 만들었다. “조국의 가난한 동포들과 감옥에서 고생하는 동지들을 생각해서 침대에서 자지 않는다.” 그가 미국에서 지킨 생활 원칙 중 하나였다. ‘5·18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의 귀국은 민주화운동 ‘피해자’가 비로소 모두 복권됐다는 상징처럼 여겨졌다. 1993년 광주로 돌아왔다. 그토록 그리던 땅에서 그는 온전한 환대를 받지 못했다.
민주당을 넘어선 정치, 통일운동을 넘어선 전망을 원했다. 1997년, 2002년 대선에서 민주노동당 후보의 지지율이 전국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광주의 현실을 고통스러워했다. 그만큼 항쟁과 인권의 도시 광주를 사랑한 죄였다. 2002년 김대중 후보의 당선에 그저 감격만 했어도, 금배지 하나쯤은 따라왔을지 모른다. 거기서 멈추기엔 그는 너무 아름다운 꿈을 꾸었다. 정치권에 기웃대는 대신 그는 ‘5·18 정신’을 전국화하는 일에 매진했다. ‘5·18 기념재단’ 설립을 주도했지만, 정작 본인의 피해 보상은 거부했다. 그에게 그날의 광주는 보상받을 무엇이 아니었다. 그가 작성한 ‘5·18 기념재단’ 창립선언문은 이렇게 끝난다.
“5월이 다시 섰습니다. 구속자, 부상자, 유가족들이 5월을 더럽히고, 가신 님들을 욕되게 하고, 광주를 부끄럽게 하고, 시민들을 분노케 한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1980년 5월의 정신과 자세로 되돌아갈 것을 다짐하며 가신 님들과 7천만 겨레 앞에 옷깃을 여미고 섰습니다. 시민들 앞에 고개 숙이고 나란히 섰습니다. ‘5·18 기념재단’이 창립되었습니다. 가신 님들이 환하게 웃고 계십니다.”
2007년, 그도 ‘가신 님’이 되었다. 향년 57살이었다. 지난 4월11일, 광주지법 재판부는 재심에서 그의 1976년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법원의 판결에 기대지 않은 인생을 살았던 그이지만, 38년 만의 명예회복은 그의 이름을 다시 쓰고 기리는 계기가 되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를 살았던 사람이 있었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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