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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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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공화국’과 ‘국민 CEO’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삼성에 기대 사는 한국 언론의 부끄러운 민낯
등록 2014-03-25 16:01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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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최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아이콘”으로 떠오르며 누리꾼들의 “칭찬 릴레이”와 “봇물 찬사”를 받고 있다. 닮고 싶은 최고경영자(CEO) 1위로 “명불허전”이며 “국민 CEO”로까지 등극할 기세다. “클래스가 다른” 선행에선 “여제의 위엄”이 뿜어져나온다. 외모는 “여성스럽고 우아”하다. “웨이브 진 헤어스타일과 페미닌하고 럭셔리한 무드의 디자인과 컬러감을 강조하는 의상”을 즐겨 입는다. 그는 “진짜 재벌가 룩”을 완벽하게 연출한다. “대박 결혼 스토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20여 년 전 봉사활동 중에 만나 부모의 반대를 뚫고 결혼한 평사원 남편은 “남자 신데렐라”로 회자된다. ‘이 사람’은 며칠 사이에 “얼굴만큼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대인배” 기업인의 상징이 됐다. 3일(3월19~21일)간의 언론 보도가 생산한 표현과 창조한 이미지다.

한 달 전인 2월25일 ‘어떤 사고’가 있었다. ‘이 사람’ 이부진(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장녀) 사장이 경영하는 호텔신라 회전 출입문을 택시가 들이받아 파손했다. 호텔 직원과 투숙객도 다쳤다. 80대 택시 기사는 급발진 때문이라 주장했고 주변의 증언도 있었다. 경찰은 택시 기사의 운전 부주의로 결론 냈다. 기사가 변상해야 하는 돈은 4억원이 넘었다. 택시 기사는 뇌경색을 앓는 아내를 돌보며 단칸방에서 살고 있었다. 이 사장은 호텔 간부를 보내 “배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다. 기사는 “내가 찾아가 사과해도 모자랄 판에 너무 고맙다”며 감격했다.

사건 발생 뒤 한 달 정도 지난 3월19일 가 ‘통 큰 배려’란 제목을 달아 첫 보도를 냈다. 이후 방송과 신문, 스포츠·연예 및 각종 온라인 매체들이 기사(3월21일 오후 6시 현재 430여 건)를 쏟아냈다. 에서만 28건의 유사 기사를 양산했다. ‘뉴스 어뷰징’(포털 사이트 노출을 통한 ‘조회 수 장사’를 목적으로 대동소이한 기사를 중복 전송)은 이 사장의 이름을 포털 검색어 1위에 올렸다. 기사들은 그의 러브스토리→패션 감각→숨겨진 선행으로 시야를 넓히더니 아버지 이건희 회장의 “명언”까지 찾아내 소개했다. “아낌없이 베풀라”는 말과 “마음이 가난하면 가난을 못 벗는다”는 말 등이 언급됐다. 한 매체는 “이번 이부진 사장의 선행도 평소 이 회장의 딸 사랑과 남다른 교육의 결과”라고 평했다. 한 지역신문은 “천사 같은 선행이다. 모든 재벌과 재벌 2세, 3세들이 호텔신라 이부진 대표만 같았으면 좋겠다”는 사설을 썼다.

택시 기사에게 책임을 묻지 않은 이 사장의 선택은 평가받을 만하다. 포기한 4억원 이상의 홍보 효과를 얻었으니 결과적으로도 현명했다. 그러나 이 사장이 ‘아름다운 경영자’로 등극하는 과정에서 언론은 다시 한번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아이콘’ 이부진과 ‘리틀 이건희’로 불리며 삼성에버랜드(경영전략담당 사장) 노동자를 탄압(1월23일 서울행정법원은 노조 설립을 주도한 직원을 에버랜드가 해고한 것은 부당노동행위라고 판결)해온 이부진은 같은 인물이다. 늙은 택시 기사에게 쇠고기와 케이크를 선물로 보낸 이부진과 ‘골목빵집 죽이기’란 여론에 밀려 사업을 철수하기까지 고급 베이커리 체인(아티제) 확장 경쟁에 몰두했던 이부진은 동일인이다. “아낌없이 베풀라”며 딸을 가르친 이건희 회장과 삼성 백혈병 환자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이 회장도 한사람이다. ‘삼성 공화국’이라 불리는 한국 사회의 생존 양식에 길들여진 언론과, 포털용 가십 기사를 양산하며 연명하는 언론과, 말해야 할 것을 말하는 대신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을 ‘너무’ 말하는 언론, 그 사이 어느 지점에서 이 시대의 신화는 ‘제조’되고 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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