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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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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어지고 세운 한 해

삼풍백화점 붕괴부터 ‘5·18 특별법’ 제정에 따른 전두환 구속까지…
젊고 싱싱했던 <한겨레21>로 돌아본 1995년
등록 2013-10-08 19:55 수정 2020-05-03 04:27

저녁 자율학습 전 친구들과 몰래 단골 분식집으로 향했다. 분식집은 백화점 지하에 있었다. 쫄면과 라면을 시켰다. “그날따라 유난히 가스 냄새가 많이 났어요.” 당시 고3이던 손은지(36)씨는 그날을 잊을 수 없다. 학교로 돌아왔는데 삼풍백화점이 붕괴됐다는 뉴스를 들었다. 1995년 6월29일 오후 6시 무렵이었다. 거짓말처럼 1시간 전까지 자신이 있던 그곳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손씨는 그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소름이 돋는다고 했다.

상식이 된 의제들 먼저 제기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설계·시공·유지관리의 부실에 따른 예고된 참사였다. 1년 전에 발생한 성수대교 붕괴 사건과 함께 압축성장의 그림자였다. 왼쪽은 5공 청산을 표지이야기로 다룬 1995년 12월21일치  제89호.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설계·시공·유지관리의 부실에 따른 예고된 참사였다. 1년 전에 발생한 성수대교 붕괴 사건과 함께 압축성장의 그림자였다. 왼쪽은 5공 청산을 표지이야기로 다룬 1995년 12월21일치 제89호.

우리네 삶이 밑바닥에서부터 허물어지던 1995년을 은 이렇게 적었다. “성수대교 붕괴가 마지막 참사이기를 바라며 맞이했던 신년의 기대는, 6월 서울 도심의 호화 백화점이 어이없이 붕괴되면서 한순간에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502명의 무고한 시민이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콘크리트 더미에 깔려 숨져가야만 했던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앞만 보고 달려온 성장제일주의가 낳은 우리 사회의 총제적 부실에 대한 반성의 기회이기도 했다.”

물론 무너져버린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해 가을, 기업을 협박해 5천억원을 챙긴 혐의로 노태우 전 대통령이 구속됐다. 최고권력자의 검은 치부가 드러난 노태우 비자금 사건은, 군사정권의 완전한 청산이라는 ‘역사 바로 세우기’의 기회를 제공했다. 시민들을 학살한 전두환·노태우 일당을 법정에 세울 ‘5·18 특별법’이 제정된 것이다. 그리하여 12월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12·12 사태와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유혈 진압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 수감됐다.

한편으로 1995년은 ‘X세대’로 대표되는 새로운 문화적 흐름이 일기 시작한 해이기도 했다. 박진영의 노출 패션과 배꼽티 열풍은 윗세대에 비해 성적으로 분방한 젊은 세대를 상징하는 표지였다. 이 제90호(1995년 3월9일치)에서 공동체를 이야기하던 그 많은 대학생들이 사라지고 대학가에는 개인주의와 소비문화만 창궐한다며 ‘대학가의 귀족문화’를 비판했지만, 이미 한국 사회는 밑에서부터 요동치고 있었다.

갓 돌이 지난 1995년의 은 젊고 싱싱했다. 부조리한 세상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5공 청산, 권언유착, 미군의 캄보디아 민간인 학살, 재벌 개혁 등 지금은 상식이 된 의제들을 먼저 제기했다. 뜨거움으로 때론 촌스러웠지만 냉정함으로 세련된 지금보다 더 인간적이었던 것도 같다. 2013년의 은 불편부당의 이름 뒤에 숨어서 뜨거움을 잃지는 않았는지.

독자와의 활발한 소통 부러워

창간호부터 이어진 독자와의 활발한 소통은 무엇보다 부러운 대목이다. 독자엽서와 독자의견이 쇄도한데다, 이주의 독자 인터뷰를 위해 제주도까지 날아가는 등 기자들도 부지런했다. 특히 듀스 멤버 김성재씨 사망 당시에는, 진실을 밝혀달라며 서울 ㅎ여고 고등학생 606명이 에 연서명부를 보내오기도 했다. 당시 독자면을 담당한 고경태 토요판 에디터는 “매주 쏟아지는 독자엽서로 골머리를 앓았다”며 “너무도 신랄한 비판을 실어서 문제의 기사를 쓴 기자와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더 빠르고 손쉽게 독자와 소통할 수 있는 오늘, 은 얼마큼 독자와 만나고 있을까.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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