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당초 안 된다고 해야 했다. 룰루랄라 가방을 싸는 남편 옆에 앉아 나는 가슴을 치며 후회했다. “유럽 출장을 다녀와도 될까?” 남편이 처음 이 질문을 던진 것은 출산을 한 달여 앞둔 시점이었다. “언제 가는데?” 출산 예정일 3주 뒤에 간단다. “산후조리하는 아내를 두고 유럽을 가겠다고?” 발끈했지만 생각 끝에 “가라”고 하고 말았다. 남편이 새로 맡은 업무 분야와 관련해 유익한 콘퍼런스가 열린다고 하니, 가지 말라고 하기 어려웠다.
‘까이꺼’ 갔다 와라, 싶었다. 산후조리원에서 2주를 지내고 집에 돌아오면 어느 정도 안정이 되겠지, 짐작했다. 게다가 우리 두 사람 모두 유럽과는 참 인연이 없어 그 흔한 배낭여행 한번 가보지 못했다. 언젠가 둘이 같이 가자고 약속했는데 이제 아기를 낳아 그 계획이 언제 실현될지 알 수 없으니 혼자라도 갔다 와라, 인심을 썼다. 게다가 출장지가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남긴 렘브란트의 고향이라고 하니 좋은 기회다 싶기까지 했다.
그때부터 남편의 눈빛이 달라졌다. 주말에 쓱 나가더니 유럽 여행 책자를 사왔다. 아아, 그의 눈은 이미 유럽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말한다. “콘퍼런스는 이틀이면 끝나는데 기왕 멀리 간 김에 며칠 더 여행하다 오겠다”고. 마침 회사에서 제일 친한 동료와 동행하게 되었으니 자동차도 렌트해 인접 국가까지 돌아보겠단다. 회사에 휴가까지 내서 일주일, 일주일을 놀고 오겠단다.
예정일보다 조금 빨리 낳아 아기가 태어난 지 한 달이 됐을 때 남편의 출장일이 다가왔다. 당시 내 상황으로 말할 것 같으면 기력이 없는 몸뚱아리에 하루 종일 흐르는 젖을 부여잡고 알 수 없는 출혈에 시달리며 심각한 비염으로 매일 코에서 피를 보고 출산 후유증으로 팔목이 아파 아기 목욕도 혼자 시킬 수 없는, 한마디로 ‘몸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였다.
가뜩이나 불만이 타오르는데 남편은 기어이 기름을 들이부었다. 출장 전날 남편은 괜스레 다정스런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회사 동료들이 기왕에 멀리 가는데 일주일로 되겠느냐며 다들 휴가 더 붙여서 놀다 오라는데… 열흘 갔다오면 안 되겠니?” 오, 마이, 갓! 하늘이시여, 정녕 이 사람이 제 남편입니까. 제가 이 사람의 아기를 낳았단 말입니까.
나는 분명한 어조로 “안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남편은 “평소 여행에 관대한 부인이 이런 걸 반대할 리 없다”고 여기는 듯 실실 웃으며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그는 이미 동료와 열흘 동안 놀다 오기로 약속을 한 것이다! 나는 출장 기간 내내 남편의 전화를 받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이런 내 복수심을 비웃듯 노는 데 지친 남편은 별로 전화도 걸지 않았다. 외면하고자 했으나 나와 ‘친구’ 관계인 남편 동료가 페이스북에 실시간으로 올리는 사진 때문에 ‘아 내 남편이 오늘 독일 아우토반을 달렸구나, 아 오늘은 스테이크를 드셨군’ 모두 알 수 있었다.
똑같이 아이를 낳아 부모가 됐는데 나는 문밖 출입도 못하는 상황에서 남편은 여전히 자유로웠다. 출산과 동시에 나의 일상은 붕괴했으나 그의 일상은 건재하다.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 열흘, 아픈 몸을 뒤척이며 ‘세 식구’가 살아갈 앞날을 생각하며 까만 밤을 보냈다.
임지선 한겨레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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