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는 젖소다. 열한 달 동안 젖먹이랑 뒹굴며 동물적인 삶을 살 다 보니 그리 되었다. 이제 아기가 어떤 자세로 젖을 물어도, 조금 당기거나 뽑거나 장난을 쳐도 난 끄떡하지 않는다. 무념무상, 허공 을 응시하는 젖소의 경지다. 아니, 그 이상이다. 아기에게 젖 먹이는 시간을 기다리는, 그 따뜻한 느낌을 사랑하는 젖소다. 잠드는 순간 까지 젖을 먹이고 자다 깨 허공을 더듬는 아기에게도 젖을 준다.
아기도 젖 먹기 달인이다. 엄마 품에 안기는 순간 목표물의 위치를 파악한다. 엄마가 가슴을 열면 기가 막히게 입을 벌려 자석처럼 젖 에 와서 착 붙는다. 젖먹이의 입 모양과 몰랑몰랑한 젖은 제대로 맞 춘 퍼즐처럼 빈틈이 없다. 아기는 보드 라운 손으로 젖을 감싸고 엄마는 복스 러운 품 안에 아기를 품는다. 평화, 그 자체다.
작은 입에 어찌 젖을 물릴 줄 몰라 결국 상처를 내고 울며불며 젖을 먹이던 초 창기의 고통은 모두 물러갔다. 100% 모 유를 먹이다 보니 분유를 사는 돈도 아 꼈고 젖병을 씻고 소독하는 수고도 덜 었다. 무엇보다 언제 어디에 가든 아기 에게 엄마인 나만 있으면 최상의 온도 와 신선도를 자랑하는 젖을 공급할 수 있었다. 젖과 엄마의 사랑을 함께 먹은 아이는 우량아로 쑥쑥 자랐다.
그런데 할 만해지니 이제 그만두란다. 이건 마치 1987년 ‘국민학교’ 1 학년 때 ‘읍니다’를 자꾸만 ‘습니다’로 써 혼나다가 간신히 ‘읍니다’에 익숙해지고 나니까 이듬해 맞춤법이 개정돼 다시 ‘습니다’에 적응하 라는 선생님 말씀을 듣는 기분이다. 나는 요즘 아기에게 젖을 물린 채 스마트폰으로 ‘젖 떼는 법’을 검색하며 괴로워하고 있다.
이제 얼마 뒤면 나는 육아휴직을 마치고 회사에 복직해야 한다. 아 기는 나 아닌 누군가와 종일 시간을 보내야 할 터다. 아기가 혼란을 느끼지 않게 되도록 돌 전후로 해서 서서히 젖을 떼야 한다. 내 가슴 에서도 더 이상 젖이 나오지 않도록 젖을 말려야 한다. 그러고 나면 아기를, 이제 갓 돌이 지난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거나 베이비시터 와 짝지어주어야 한다. 그러고 나면 나는 나의 일터, 아아 내가 사랑 해 마지않던 일터로 돌아가야 한다.
2년 전 예상치 못한 임신으로 아기를 갖고 일터에서 내 자리가 사라 질까 전전긍긍하던 나는 어디에 있는가. 복귀를 앞두고 나는 젖 하 나 떼지 못하고 울먹거리고 있다. 아기에게 미안해서 하루 더 먹이 고, 포근한 느낌이 벌써부터 그리워 한 번 더 먹인다. 그렇게 아기를 끌어안고 심란해하다 한숨을 쉬며 ‘여보, 나 회사 그만둘까’ 말한다. 이 사회가 노동자에게 허락한, 엄마로서 최대로 아기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인 1년을 다 써가는 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젖을 떼고 아기를 떼어놓을 준비를 할 시간이다.
임지선 한겨레 기자*이 글은 육아 사이트 ‘베이비트리’(babytree.hani.co.kr)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