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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다뇨, 죽을 뻔했어요

시각예술가 이 단의 빨강바지
등록 2012-05-24 11:24 수정 2020-05-03 04:26
이 단 제공

이 단 제공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옛날부터 엄마는 자주 즐겨 점을 보곤 했다. 아마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어느 날 오후 엄마는 집으로 커다란 꾸러미를 들고 돌아왔고, 급히 나를 불러 소지품 중에 빨간색 물건들을 모두 가지고 오게 했다. 불그스레한 핑크나 자주색에 가까워 딱히 빨강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는 것까지 포함한다면, 보통의 여자아이가 갖고 있는 붉은 계열의 물건이란 과장해서 ‘전부’라고 할 만큼 무시무시하게 많은데, 엄마는 그것들을 가지고 나가 모두 불태워버렸다. 이유인즉슨, 그날 엄마가 찾아간 무속인은 ‘색깔’로 점을 보는 사람이었는데, 나에게 빨강이 아주 좋지 않다고 하며, 빨간색 물건을 소지하면 성년이 되기 전에 단명한다 했다는 것이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빨강은 언제나 무의식적으로 순간 나를 움츠러들게 했다. 너무나 고혹적이지만 가질 수 없는, 가져서는 안 되는. 이를 극복하는 데는 꽤나 많은 노력과 시간이 걸렸는데, 그렇게나 가고 싶었던 미술대학에 입학한 이후, 문득 다루지 ‘못하는’ 색이 있으면 곤란하겠다는 생각에 나는 본능적으로 밀려오는 무서움을 참아가며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붉은색에 매달렸다.

말하자면, 이 빨강바지를 입기 시작한 것도 그 ‘특훈’의 일부였다. 하지만 지금처럼 고맙게도 다양한 색깔군의 바지가 존재하지 않았던 2000년 당시에는, ‘내 여동생이었으면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렸을 것’이라는 분노의 일갈부터 ‘빨갱이 소시지’라는 비아냥까지 다양한 반응을 봐왔다. 사실 아무에게도 실질적인 피해를 주지 않는 이 바지가 본의 아니게도 다각적이고도 열렬한 반응들로 안 그래도 외강내약(外强內弱)했던 나의 맷집을 심심찮게 향상시켜주고 말았다.

이름도 그렇고, 작품들도 그렇고, 소지품들도 그렇고, 빨간색을 (아주) 좋아하나 봐요, 라는 말을 지금도 종종 듣는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이것 때문에 죽을 뻔했어요, 라고 단순모호하게 대꾸해버린다. 솔직히 극복하고 싶었다, 가지고 싶었다, 강해지고 싶었다, 아름다워지고 싶었다, 단순하고, 어리석고, 멍투성이에, 자기중심적이고, 지금도, 그래도, 그래서, 좋다, 따위의 단어 조합을 꾹 눌러 삼키며 웃는다. 너는 나의 무기이자 채찍이자 동지다.

여담으로, 나의 친오빠는 더욱 사정이 딱했다. 그 무속인은 흰색이 오빠에게 좋지 않다 단언했고, 그날로 즉시 오빠의 흰색 속옷들은 숙청되었다. 그날 엄마가 들고 온 꾸러미는 이를 대체할 오빠의 새 속옷이었는데, 문제는 1980년대 당시에 흰색이 아닌 아동용 속옷이 드물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오빠의 속옷들은 야릇한 변태적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망사 소재, 또는 남성성을 물씬 강조한 호피 무늬, 드물게는 둘의 조합으로 졸지에 구성돼버렸고, 역시 초등학생이었던 오빠는 한동안 학교에서 화장실을 가지 못했다. 현재 자의 반, 부모님의 의지 반으로 의사가 된 오빠는 매일 흰 가운을 입는다.

시각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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