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세 감독이 를 찍는 와중에 해고됐다. 이명세 감독의 ‘해고’ 원인은 애초에 제시한 시나리오와 찍어온 필름이 달라서였다(대사가 있어야 하는 장면에서 없었다고 한다). 충무로에서 도는 흉흉한 소문이던 이 소식을 전하며 영화평론가 김영진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 충무로에선 감독이나 제작자가 중심이 아니다. 그들 대다수는 투자사에서 용역을 받은 하청업자일 뿐이다. 현장에선 효율이 가장 중요하고 대본에 쓰여 있는 대로 그림만 재미있게 맞춰 찍어내면 관객을 만족시킬 수 있는 영화가 나온다고 투자사 관계자들은 생각한다.”( 4월15일치)
<font color="#1153A4">극도로 세분된 문화산업, 그 속에서 영화사는 은행</font>
충무로가 닮고 싶어 하는 ‘효율선생’ 할리우드 시스템을 이 책에서 자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프레데릭 마르텔 지음, 권오룡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프랑스 언론인 프레데릭 마르텔은 ‘콘텐츠 산업’을 찾아 5년에 걸쳐 전세계 30개국 150여 개 도시에서 1250명의 사람을 만났다. 마르텔의 관심은 미국과 그 외 나라들로 구분된다. 전세계 극장에 50%의 영화를 걸고 있는 미국과, 언제나 미국을 의식해 문화적 다양성을 강조하며 끊임없이 미국을 모방하는 ‘미국 외 국가’들이다. 그의 문제의식은 (간추리자면) ‘대중적 엔터테인먼트라는 미국식 모델이 어째서 세계를 지배하는 것일까, 이 모델은 본질적으로 미국적인 것인가, 세계화의 이데올로기가 돼버린 문화적 다양성이란 실제적인 것인가’ 등이다.
그가 미국에서 만난 할리우드의 영화산업은 극도로 세분화된 ‘사업’이다. 영화사들은 ‘은행’ 역할을 한다. 텔레비전 방송사나 비디오게임 회사에 판권을 팔아 돈을 끌어들이기도 하지만 투자자를 직접 찾아나서기도 한다. 헤지펀드나 연기금, 투자 파트너, 은행 대부, 그리고 개인 투자자, 인도의 억만장자, 부유한 아랍 왕자… 돈에는 국적이 없다. 영화사들 역시 국적을 따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컬럼비아픽처스는 일본 자본 소니가 소유하고 있지만 일본과는 완전히 별개의 영화사다.
소니픽처스엔터테인먼트의 전임 부회장인 켄 렘버거는 말한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할리우드에는 단 하나의 주인밖에 없어요. 그 주인은 은행도 프로듀서도 탤런트 에이전시도 아니고 수백만달러짜리 스타들도 아닙니다. 주인은 바로 영화사예요. 영화사들이 위험부담자라는 말이지요.”
영화사는 단계별로 파란불을 켜고 매뉴얼대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영화사는 하청의 하청의 구조를 지닌다. 독립영화사들은 한 영화사와 계약돼 월급을 받거나 위탁 경영되는데, 기획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권리를 지닌다. 영화사들은 이 독립영화사들에서 시나리오를 사오고 투자 결정을 내린다. 또 탤런트 에이전시가 있다. 이 에이전시는 할리우드 여기저기를 날아다니는 시나리오를 잡아채서 개발한다.
대규모 자본이 투자되려면 나이·성별·피부색 기준에 따른 관객 집단이 적정 규모가 돼야 한다. 여자는 남자친구 따라 액션영화를 보지만 남자는 여자친구 따라 ‘계집애’ 영화는 보지 않기 때문에 25살 이하의 여자들만 재미있어할 영화는 위험도가 높다. 포커스 그룹이 파란불을 켜려고 나타난다. 잠재적 표적에 속한 이 사람들의 반응은 성공을 측정하는 데 ‘오차 범위가 없을 정도’다. 그들의 반응에 따라 출시일이 재조정되거나 상영 시간이 짧아지고 필요하다면 해피엔딩도 바뀐다. 이후 마케팅이 시작된다. 연계 상품이 개발되고 배우들이 인터뷰를 하고 예고편이 상영된다. 마케팅비는 최근 영화 제작비의 50%에 이른다.
미국 이외의 나라들은 어떨까. 인도의 발리우드는 할리우드가 판매하는 표수인 26억 장보다 많은 36억 장을 판매한다. 그들의 자부심도 거기서 나온다. 미국 메이저 영화사들이 인도에서 거둔 실적은 대단치 못하다. 인도 배우를 고용해 찍은 영화들의 수익도 별 볼일 없었다. 이집트 카이로에서는 라마단 연속극을 개발하고, 남미에서는 라티노 텔레노벨라를 대규모로 생산한다.
미국과 미국 외의 나라를 둘러본 저자의 결론은 이렇다. “경제적 분야에서만이 아니라 이제는 콘텐츠 산업에 있어서도 신흥국가들이 강력하게 떠오르고 있다. …어떤 경우이든 현재 진행 중인 것은 미 제국의 몰락이라기보다는 새로운 경쟁자의 출현이다.”
<font color="#1153A4">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자본의 평정 </font>
하지만 ‘문화에서 재현되고 있는 문명의 충돌’이라는 결론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세계는 ‘미국화’하면서 자국 시장을 지켜내고 있다. 카이로와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라마단 연속극들은 미국화된 메인스트림의 하위문화 형식으로 재생산된다. 중국은 불법 복제물을 단속하지 않고 미국 메이저 자본과 합작한 뒤 소유 제한 법률을 개정하는 등 외국 자본의 뒤통수를 쳤다. 그러나 중국조차 “수백 개의 중국 채널들을 보면 상당히 많은 수의 프로그램들이 미국에서 들여온 텔레비전 포맷을 모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549쪽)고 할 정도다. 아시아 시장을 장악한 한국의 음악 역시 미국의 주류 음악을 받아들이고 스타 시스템을 완성한 뒤에야 ‘케이팝’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미국 교외 도시에서 시작된 멀티플렉스는 전 세계의 영화 경험이 되었다.
한국 영화 시스템을 말해 무엇하랴. 포커스 그룹이 평점으로 시나리오를 좌지우지하더니 영화사는 촬영 현장을 통제하고 ‘갑’이 누군지 확실히 보여주려고 감독을 해고한다. 미국화한 시스템의 다른 이름은 자본이고, 약진하는 미국 외 나라의 ‘갑’ 역시 마찬가지다. 충돌이 아니라 자본의 평정이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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