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거부할 수 없다, 이 주문. 소금은 ‘소금소금’, 후추는 ‘후추후추’, 파슬리는 ‘파슬파슬’ 뿌려댄다. 닭가슴살 대신 ‘닭찌찌’ 두 덩이를 프라이팬에 투척. 빠져든다, 너는, 이 요리에. “그러니까 퍼머겅. 두 번 퍼머겅.”
지난해 9월 말 한 포털 사이트에 이상한 요리 블로그가 열렸다. 계량 따윈 하지 않는다. 양념은 아빠 밥 숟갈로, 재료는 한결같이 냉장고에서 자다 나와 잠이 덜 깬 것들이다. 게다가 어지럽혀진 부엌에서 도망이라도 칠라치면 어김없이 날아오는 엄마의 ‘등짝 스매싱’. 읽는 사람이 침을 삼키는 대신 침 튀기며 웃게 만드는 우사미(20·본명 정다정)라는 필명의 요리 블로거는 삽시간에 유명해졌고, 지난해 말 그는 입시준비생에서 웹툰 작가로 변신했다.
잉여로움으로 구워낸 요리
지난 3월27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만화기획사 사무실에서 만난 정다정 작가는 “만화 제목에 ‘야매’라는 말과 ‘역전’이라는 말은 꼭 들어갔으면” 바랐단다. “요리에 정석이 어디 있나요. 자기 식대로 요리하며 맛도 좋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게 역전이죠. 그런데 맛이 괜찮은 요리가 잘 안 나오네요. 하하.” 요리를 좋아하고 아는 것도 많았지만 크로켓도 커틀릿도 만화 그리며 처음 해봤다. 자연히 실패담이 따를 수밖에 없지만 그걸 감추면 ‘야매’ 맛이 안 난다 싶었다. 만화 한 편을 그릴 때 수백 장의 사진을 찍고 거기서 70~80장을 추려낸다. 친절하게 사진으로 요리 과정을 안내하지만 맛은 책임지지 않는다. “마른 고추가 없으면 그냥 고추. 마른 고추는 5분 말린 거나 하루 말린 거나 그게 그것임.” 달걀찜 하나 만들려고 달걀 한 판 다 쓰고 부엌은 폭발사건 현장으로 만드는 그는 미식의 계절을 타고 아트로 승천하려는 요리계에 나타난 ‘생계형 야매 요리사’다.
요리 가이드가 아니라면 이것을 만화라 불러야 할까. 정다정 작가의 블로그 글이 웹툰 조회 수 최고 기록을 넘어서자 만화가들은 충격을 받았다는 소문이다. 는 매주 한 가지 요리에 도전하는 만화다. 설정은 그렇지만 요리는 곧잘 산으로 가고, 가족들은 그의 요리를 먹지 않으려고 자리를 피한다. 읽는 사람도 레시피의 정확성을 따지기보다는 그 안에서 끓고 있는 웃음 코드에 녹아들기 바쁘다. 웹툰 연재를 시작하며 일본 만화 의 주인공 ‘눈빛 더러운 토끼’가 주인공으로 그려지지만 여전히 만화를 끌고 가는 큰 줄기는 요리 사진에 곁들인 자막 글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거지는? …설거지.” 잉여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그의 부엌과 속사포 같은 말발에 반한 사람들이 모인 팬카페도 만들어졌다. 첫눈에 사랑을 고백하는 댓글들을 보면, 팬심마저 기존 만화작가들을 향한 것과는 좀 다른 듯하다. 요리도, 만화 그리는 기술도, 기성 작가엔 못 미칠지 몰라도 잉여로움을 먹음직스럽게 구워내는 한 동료에 대한 환호와 지지처럼 보인다. ‘야매요리’에 반한 아이돌 그룹 샤이니의 종현이 ‘트친’(트위터 친구) 맺자고 달려와도 팬들은 샘내기는커녕 기뻐했지만, 정 작가가 부산에 있는 외국어고등학교를 다니다가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사실이 알려지자 실망하는 댓글이 줄을 이었다. “저도 그 댓글 많이 봤어요. 잉여인 줄 알았는데 유학도 갔다 왔느냐는 댓글. 그런데 허울만 좋은 잉여예요.”
밑천도 자존감도 없지만, 쫄지마
만화가가 되고 싶어 혼자 만화책을 만들던 아주 어릴 적의 꿈은 곧바로 접혔다. 내신 70%만 벗어나도 실업계 고등학교로 가야 하는 중학교 때부터 눈만 뜨면 경쟁, 경쟁이었다. 고등학교는 외국어고등학교를 가야 하고, 대학은 ‘인서울’, 그것도 ‘스카이’쯤은 가야 낙오자가 되지 않는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공기업에서 오래 일한 아버지의 바람대로 장차 고위 공무원에 도전해야 사람답게 사는 줄 알았다. 점점 말이 없어졌고 낯가림이 심해졌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일찍 떠난 유학길에서 난생처음 긴장을 놓아버렸다. “우리나라에선 항상 남보다 빨리 선행을 하고 몇 살 때 좋은 대학을 가고 몇 살 때 취직해야 좋은 인생이라고 쳐주는데, 다른 나라에 가니 정해진 틀이란 게 없었어요. 그래서 마음도 푹 놓고 공부
도 놓아버렸어요. 놀았지요. 놀면서도 맨날 유머 게시판만 들여다보고 앞으로 뭐가 될까 고민했는데, 결국 그 시기에 성격이 많이 바뀌고 친구도 많이 생기고 내공을 잔뜩 쌓았어요. 이젠 잉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직업을 갖게 돼서 기뻐요.” 한국에 돌아와서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지난해, 밖에 나갈 수도 없고 공부도 손에 잡히지 않아 시작한 블로그 덕에 웹툰작가의 길을 찾았다. 그야말로 역전이다.
정다정 작가가 가장 은혜롭게 여기는 댓글은 “우리 어머니도 좋아하신다”와 “회사나 학교에서 만화를 보다가 혼났다”는 댓글이란다. 20대 잉여들의 유머가 어머니 세대도 웃길 수 있다니 좋고, 나만 혼나며 만화를 그리는 게 아니라 ‘독자 너님들’도 혼난다니 그것도 좋다. 아버지는 이젠 “네가 자랑스럽다”고 말하며 독자들의 반응도 대신 살핀다. “얼마 전에 아버지가 검색하시다가 ‘다정아, 네가 이제 밑천 다 떨어졌다는 의견이 있던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그러시더라고요. 전 원래 밑천이라곤 없었어요.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하는 거예요. 달리 야맨가요. 자존감이 부족해서 처음엔 나 따위가, 나 같은 게, 어떻게 만화가라고 하나 자괴감에 시달렸어요. 몇 회나 더 갈 수 있을지 나도 몰랐고요. 그래도 그림은 그리다 보니 늘고, 쫄지 않고 내 스타일을 고수하다 보니 한결 여유가 생겼어요.” 얼마 전엔 웹툰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도 했다. 대학에 갔으면 선배나 친구가 되었을지 모르는 그들에게 아직 웹툰작가라기엔 한참 모자라는 자신이 뭐라 해야 할지 난감했다. “스펙 쌓는 데만 치중하지 말라고 했어요. 20대가 야매 아니고는 뭘 할 수 있겠어요. 정말 힘든 거 아는데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해서 자기한테 힘이 되는 길을 찾으라고 했죠. 중요한 결정은 정석이 아니고 야매여도 괜찮으니까 소신껏 해보자고요.”
어느 야매감독의 역전극
회사에선 비정규직, 예술현장에선 무허가. 지금 젊은 세대들에게 야매밖에 길이 없을지도 모른다. 지난 3월18∼21일 열린 ‘제2회 올레 스마트폰 단편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영화 도 그런 알싸한 야매의 향을 풍긴다. 는 힙합이 대한민국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는 엉뚱한 가정으로 시작한다. “부모들이 래퍼의 이름을 따서 아이들의 이름을 짓고 힙합만이 부를 쌓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된 사회”에서 아이돌 음악은 멀리 주변으로 밀려난단다. 힙합의 지배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도시 인천 작전동을 지키려고 주인공들이 랩배틀에 나선다는 설정은 물론 꿈이다. 이 영화는 아이돌 음악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10년 넘게 힙합을 해온 채여준 감독과 니오 크루세이더스 멤버들이 만들었다. 현실과는 정반대로 설정해 니오 크루세이더스는 자신들의 음악을 마음껏 펴놓고, 연기 대신 랩으로 종알거린다. 힙합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는 꿈이 끝나자 영화에선 갑자기 음악이 뚝 끊기고 건조한 대사가 빨라진다. 는 힙합이 영화음악은 물론 서사와 리듬감을 떠맡자 힙합하는 이들이 자꾸만 쪼그라드는 현실을 유쾌하게 걷어찬다. “큰일이야, 모두 힙합만 하느라 진부한 사랑 노래나 이별 발라드는 완전히 사라지겠어.” 단편영화 598편 사이에서 대상을 받은 것은 현실을 비트는 래퍼들의 감각이 빛을 발했기 때문일 테다.
이 영화를 연출하고 각본을 쓴 채여준 감독은 다니던 인하대 언론정보학과를 2학년 때 중퇴하고 밴드를 만들었다. 당시는 힙합이 물오르던 시대
였다. 그러나 그 뒤로 힙합은 아이돌 음악의 그늘에 가려졌다. 채여준 감독의 인생도 그런 듯했다. ‘비트 씨씨엠’이라는 밴드 이름으로 1집을 냈지만 소속사는 망해버렸다. 모두 음반사업에서 손을 떼고 싶어 했다. YG엔터테인먼트 공개 오디션에서 최종 합격했지만 곧 입대를 해야 했다. 다시 나온 세상은 대학중퇴자가 살기엔 만만치 않았고, 음악을 하기엔 더 무섭게 변해버렸다. 그사이 채 감독의 가족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버려 당장 살 곳조차 없었다. 영어학원 강사를 하며 음악을 틈틈이 만들고 뮤직비디오도 찍었다. “2008년 자살이 사회문제가 되기 시작할 때
힙합 스피릿과 야매 정신
“음악은 좋지만….” 영화 말미에 나온 기획사 사장이 거절하는 말은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흔하게 들었던 클리셰다. 제작비 100만원. 헝그리 힙합 정신으로 찍은 이 영화에서 채 감독은 1인 3역을 맡았다. 영화는 주로 작전동 작전시장에서 찍었지만 이름이 너무 촌스러워 ‘작전씨티’로 바꿔 달았다. “슬픈 이야기긴 한데 우울하게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주류가 아닌 분야에서 자기 일을 하느라 힘든 사람들에게서 공감도 얻고 서로 치유도 하고 그랬으면 했어요.” 채여준 감독은 상금 2천만원을 자본 삼아 디지털 싱글과 다음 영상 작업을 준비하며 본격적인 역전극을 꿈꾼다. “루저들에게 허황되지 않은 꿈을 갖게 해주고 싶다는 꿈이 있어요. 젊다면, 팔다리가 있고 갈 수 있다면 한번 해보자고 멤버들을 회유하죠.” 그러고 보니 ‘힙합 스피릿’과 ‘야매 정신’은 서로 닮았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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