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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진 월북’과 ‘이중 간첩’ 사이

기자들이 사라지는 경로
등록 2012-03-03 13:45 수정 2020-05-03 04:26
<한겨레> 김진수

<한겨레> 김진수

자존심, 입대할 때 버렸다. 기자정신, 입사할 때 생겼다. 지금은? 가출 청소년처럼 기자정신도 들었다 나갔다 한다. 친구, 신문·잡지도 안 봐주는 놈들이 무슨. 머리털, 약으로 버틴다. 이거, 어디 갔느냐고 묻기에 하는 말이다. 자존심이고, 기자정신이고, 친구고, 머리털이고 지금은 어디 갔니?

기자들도 사라진다. 출입처에서, 현장에서, 지면에서. 기자들이 사라지는 경로는 이렇다. 출입처 변경. 사회부 기자를 하다가 어디, 경제부나 정치부로 바뀌는 경우다. 원출입처에서나 어디로 갔는지 잠깐 궁금해한다. 그것도 잠시, 바로 그날로 보도자료 메일링 리스트에서 이름을 지워버린다. 내근직 변경. 국제부나 편집부 같은 내근 부서로 인사가 나면 ‘현장’에서 사라진다. 서울에서 아무리 미국의 버락 오바마를 기사로 조져도 백악관에서 밥 한번 먹자고 연락 안 온다.

지면에서 이름이 사라지는 경우는 좀더 극적이다. 보수 신문에서 이름을 날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지면에서 자취를 감췄다. 다들 궁금해하던 차, 얼마 뒤 그는 기자로 ‘신분 세탁’을 하고 검찰 기자로 나타났다. 공안검사는 “납북된 거냐”고 물었다. 가 무슨 북송선이라도 운영하는 줄 아나. 우리들은 “자진 월북”이라고 맞섰고, 납북-월북 논쟁은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이어졌다. ‘합동심문조’에 구멍이 난 적도 있다. 몇 년 전 한 기업지(한국에 경제지가 있었나?) 중견기자가 에 ‘전향’ 의사를 밝히고 입사했다. 몇 달 뒤, 그는 다시 원래 있던 기업지로 돌아갔다. ‘위장 월북’ ‘이중 간첩’ 소문이 돌았다.

종편을 운영하는 한 신문사 오너가 최근 ‘한겨레 기자 영입 지시’를 내렸다는 풍문이 떠돌았다. 진보적 색깔이 필요했다나. 사실이건 아니건, 나한테 영입 제의가 들어오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보수가 보기에도 진보로 인정 하기 어려울 정도인가. 어쨌든 지면에서 사라진 기자들이 화면에 나타나는 경우는 있지만, 화면에서 사라진 기자가 지면에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신문사보다 방송사의 근무 조건이 좋다는 이유도 있지만 신문기사와 방송뉴스 사이에는, 비유컨대 진중권과 심형래 사이의 간극이 있다. 수준이 아니라 그만큼 다르다는 것이니 오해 없도록 하자(어느 신문기자-방송기자 커플은 싸울 때 ‘신문것들’ ‘방송것들’이라는 용어를 쓴단다). 5~6년 전 공중파 방송의 한 기자가 로 ‘이종교배’를 결심했다. 부모가 회사까지 찾아와 말렸다. 결국 그 기자는 포기했다. 요즘도 다니고 있다면 정신 나간 사장 밑에서 고생깨나 하고 있을 거다.

독자들이 ‘그 기자, 어디 갔어? 요즘 기사가 안 보이네’라며 관심을 보일 정도로 잘나가는 기자라면 모를까, 별 걱정을 다한다. 앞으로 옛 기사와 보도사진 속에 등장하는 과거를 찾아가보겠다. 이 길이 아니다 싶으면 딴 길로 빠질지 모른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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