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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술꾼의 자기연민

도전, 상그리아
등록 2011-09-08 18:08 수정 2020-05-03 04:26
» 한겨레21 고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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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술 마시다 취한 사람의 전화를 받는 일은 난감하다. 찌질한 독백을 끊고 전화기를 가로채줄 사람이 없는 상황은 전적으로 전화를 받는 사람에게 불리한 게임이다. 술 취하면 앞뒤 맥락 없이 상대방이 갑자기 전화를 끊었다는 사실만 기억하는 기억력의 소유자라면, 더욱 그렇다. 그는 맥락을 왜곡한 채 기억 폴더에 저장하는, 말하자면 로모 카메라다. 괴롭다.

이렇게 생각하는데도 왜 점점 혼자 술 마시는 날이 느는지 나도 모르겠다. 내가 혼자 술 마시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다. 일단 취재원과 저녁 자리에서 술이 좀 모자랄 때, 어중간하게 밤 11시에 끝난 저녁 자리를 파하고 지하철을 나올 때면 편의점을 그냥 지나칠 도리가 없다. 환하게 불 켜놓은 방에서 권투선수 오스카 델라 호야와 아투로 가티의 오래전 시합이나 매니 파퀴아오와 리키 해튼의 비교적 최근 시합 동영상 따위를 보며 캔맥주나 와인을 홀짝이게 되는 것이다.

말 그대로 그냥 술이 당길 때가 두 번째 케이스다. 주위 사람으로부터 “너 그러다 알코올중독 된다”는 말을 듣게 되는 경우다. 지난해 들었던 최악의 케이스는 이렇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맥주 1600㎖와 소주 1병을 사들고 와서 방에서 소폭을 만들어 마신다고 그 여자는 말했다. 자신을 괴롭힌 사람의 이름을 외치며 울며 마신단다. 반지하에 산다거나 비정규직으로 유통업에 종사한다는 사실을 빼고 아는 게 없어, 그의 그런 술버릇이 어디서 왔는지는 분명치 않다.

“제발 혼자 술 마시지 말라”는 어머니의 지청구에도 가끔 캔맥주를 홀짝이는 걸 포기하긴 쉽지 않을 것 같다. 일단 너무 덥다. 다만 혼자 술 마시기 놀이에는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선이 존재한다. 무라카미 류는 욕망을 억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도시에서 살 수 없다고 썼다. 자기연민을 억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혼자 술 마실 수 없다. 술에 취해 길에서 죽은 에드거 앨런 포의 시 ‘외로운 술꾼’(Lonely boozer)은 그러므로 좋은 반면교사가 된다.

“버지니아, 버지니아/ 맥아에서 천상의 이슬을 맺게 하는 효모라는 태양이 뜨면/ 나는 햇살 아래 춤추는 조르바, 내 무덤에 나를 묻고 즐겁게 한잔하네/ 버지니아 그 술을 네가 따라준다면.” 자기가 자기를 묻고 즐거워하는 저 뒤틀리고 꼬인 심사란! 자기연민은 혼자 술 마시기의 최대 장애물이다. 덫에 꼬리가 걸린 늑대는 고개를 돌려 옴짝달싹 못하는 꼬리를 쳐다보며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하면서도, 울지 않는다. 혼자 술 마시기에는 그런 정신이 필요하다.

갑자기 더워져서 에스파냐의 대중음료 상그리아를 만들어봤다. 재료는 드라이한 화이트와인, 레몬 또는 오렌지, 무설탕 탄산수, 얼음, (혹시 있다면 민트). 그릇에 화이트와인, 채썬 과일, 탄산수 등을 넣는다. 3시간 이상 냉장고에 잰다.(다음 미즈쿡 참조) 원래 레드와인으로 만들지만 산미가 있는 화이트와인 상그리아를 나는 선호한다.

이제 남은 건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고 상그리아 혼자 마시기 놀이다. ‘그때 그(그녀)에게 왜 그랬을까’ ‘그 회사를 나오는 게 아니었어’ ‘서울 바닥에서 힘들게 여기까지 왔구나’라는 생각 가운데 하나라도 하게 된다면, 당신은 지는 거다. 진짜 그런 시가 있는 줄 착각하고 구글에 ‘외로운 술꾼’ 전문을 검색하고 있는 독자도 마찬가지.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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