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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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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를 돋보이게 하는 밥처럼

도전, 김치파스타
등록 2011-12-23 11:24 수정 2020-05-03 04:26

‘나는 □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꽤 오래전에 카피라이터 수업을 들었다. 첫 수업 과제가 바로 이 문장이었다. 빈칸에 적절한 단어를 써서 비유법으로 자기소개를 하라는 취지였다. 여러 단어들이 나왔다. ‘술’ 따위의 예측 가능한 단어도, 물론 빠지지 않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유명 카피라이터 출신 선생님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한 명이 제법 괜찮은 평가를 받았다. “나는 밥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그 수강생이 말하자, 창밖을 보던 선생님이 그를 쳐다봤다. 늘 곁에 있어도 질리지 않는 사람, 스스로 튀기보다 다른 반찬과 어울리는 사람, 그러면서도 언제 어디서건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사람, 이라는 뜻이었을 게다. 이런 멋진 비유법을 봤나. 이런 밥 같은 녀석! (생각해보니 여자 수강생이었던 것 같기도.)

지금은 경제부를 출입하는 어떤 선배라면 □ 안에 ‘파스타’라고 써넣었을 게다. 그것 역시 멋들어진 비유법이 된다. 파스타는 이탈리아의 밥이니. 파스타도 밥처럼, 스스로 튀기보다 다른 고명과 어울리며, 늘 먹어도 질리지 않고, 그러면서 (이탈리아에서는)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존재.

심지어 김치파스타도 있다. 김치파스타가 무슨 파스타냐고 되묻는 사람은 이 글의 첫 문장을 다시 읽어주시라. 누구와도 웬만하면 어울리는 게 밥의 정신(=파스타 정신)이다. 김치라고 안 되겠는가. 졸린 눈을 비비며 그 선배가 권한 김치파스타 조리법을 다시 읽었다. 가스레인지에 불을 두 개 켰다. 약한 불에 냄비를 올리고 파스타 삶을 준비를 했다. 오른쪽 불 위에는 프라이팬을 올렸다. 조리법을 다시 읽었다. 냄비에 물이 끓자 파스타를 넣고 스톱워치를 눌렀다. 7분을 넘기면 안 된다. 달궈진 펜에 올리브유를 넣고 마늘을 살짝 볶았다. 양파를 넣고 볶았다. 조리법에는 고기를 넣으라고 했다. 햄을 송송 썰어 대신했다. 양파와 햄이 얼추 익자 김칫국물을 머금은 김치를 넣고 볶았다. 배추김치 대신 잘 익은 총각김치를 썰어넣었다. 부엌은 금세 양파와 김치 볶는 냄새로 가득 찼다. 이른 아침부터 맥주를 한 캔 따서 파스타 접시 앞에 앉았다.

사소한 오류가 눈에 띄었다. 조리법은 ‘양파→고기→김치’ 순서로 볶으라고 했다. 나의 경우 배추김치가 아닌 총각김치였으므로 ‘양파→김치→햄’ 순서로 넣어야 했다. 햄도 고기만큼 오래 볶을 필요가 없었다. 어쨌든 김치파스타는 꽤 먹을 만한 김치볶음밥 맛을 냈다. 독자 여러분, ‘먹을 만했다’는 내 자화자찬에 너무 분노하지 마시라. 김치볶음밥을 먹을 만하지 않게 만들기도 어려운 일 아니겠습니까.

스파게티, 마카로니, 펜네, 링귀네 등 모양과 이름은 다르지만 파스타의 사교성은 끝내준다. 누구의 옆에 있어도 그 사람을 돋보이게 해주는 밥처럼. 그러면서도 자신도 인정받고 사랑받는. ‘○○○는 완전 우리 밥이야, 그치?’라는 문장은, 실은 굉장한 칭찬이었던 거다. 파스타의 사교성이 궁금한 사람은 (권은중 지음·바다출판사 펴냄)를 보시길.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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