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꽤 오래전에 카피라이터 수업을 들었다. 첫 수업 과제가 바로 이 문장이었다. 빈칸에 적절한 단어를 써서 비유법으로 자기소개를 하라는 취지였다. 여러 단어들이 나왔다. ‘술’ 따위의 예측 가능한 단어도, 물론 빠지지 않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유명 카피라이터 출신 선생님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한 명이 제법 괜찮은 평가를 받았다. “나는 밥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그 수강생이 말하자, 창밖을 보던 선생님이 그를 쳐다봤다. 늘 곁에 있어도 질리지 않는 사람, 스스로 튀기보다 다른 반찬과 어울리는 사람, 그러면서도 언제 어디서건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사람, 이라는 뜻이었을 게다. 이런 멋진 비유법을 봤나. 이런 밥 같은 녀석! (생각해보니 여자 수강생이었던 것 같기도.)
지금은 경제부를 출입하는 어떤 선배라면 □ 안에 ‘파스타’라고 써넣었을 게다. 그것 역시 멋들어진 비유법이 된다. 파스타는 이탈리아의 밥이니. 파스타도 밥처럼, 스스로 튀기보다 다른 고명과 어울리며, 늘 먹어도 질리지 않고, 그러면서 (이탈리아에서는)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존재.
심지어 김치파스타도 있다. 김치파스타가 무슨 파스타냐고 되묻는 사람은 이 글의 첫 문장을 다시 읽어주시라. 누구와도 웬만하면 어울리는 게 밥의 정신(=파스타 정신)이다. 김치라고 안 되겠는가. 졸린 눈을 비비며 그 선배가 권한 김치파스타 조리법을 다시 읽었다. 가스레인지에 불을 두 개 켰다. 약한 불에 냄비를 올리고 파스타 삶을 준비를 했다. 오른쪽 불 위에는 프라이팬을 올렸다. 조리법을 다시 읽었다. 냄비에 물이 끓자 파스타를 넣고 스톱워치를 눌렀다. 7분을 넘기면 안 된다. 달궈진 펜에 올리브유를 넣고 마늘을 살짝 볶았다. 양파를 넣고 볶았다. 조리법에는 고기를 넣으라고 했다. 햄을 송송 썰어 대신했다. 양파와 햄이 얼추 익자 김칫국물을 머금은 김치를 넣고 볶았다. 배추김치 대신 잘 익은 총각김치를 썰어넣었다. 부엌은 금세 양파와 김치 볶는 냄새로 가득 찼다. 이른 아침부터 맥주를 한 캔 따서 파스타 접시 앞에 앉았다.
사소한 오류가 눈에 띄었다. 조리법은 ‘양파→고기→김치’ 순서로 볶으라고 했다. 나의 경우 배추김치가 아닌 총각김치였으므로 ‘양파→김치→햄’ 순서로 넣어야 했다. 햄도 고기만큼 오래 볶을 필요가 없었다. 어쨌든 김치파스타는 꽤 먹을 만한 김치볶음밥 맛을 냈다. 독자 여러분, ‘먹을 만했다’는 내 자화자찬에 너무 분노하지 마시라. 김치볶음밥을 먹을 만하지 않게 만들기도 어려운 일 아니겠습니까.
스파게티, 마카로니, 펜네, 링귀네 등 모양과 이름은 다르지만 파스타의 사교성은 끝내준다. 누구의 옆에 있어도 그 사람을 돋보이게 해주는 밥처럼. 그러면서도 자신도 인정받고 사랑받는. ‘○○○는 완전 우리 밥이야, 그치?’라는 문장은, 실은 굉장한 칭찬이었던 거다. 파스타의 사교성이 궁금한 사람은 (권은중 지음·바다출판사 펴냄)를 보시길.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미국 최고 의사’ 84살 김의신 “암에 좋은 음식 따로 없어, 그 대신…”
“명태균에 아들 채용 청탁…대통령실 6급 근무” 주장 나와
“대통령 술친구 이긴 ‘김건희 파우치’…낙하산 사장 선임은 무효”
관저 유령건물 1년8개월 ‘감사 패싱’…“대통령실 감사방해죄 가능성”
법원, KBS 박장범 임명 효력정지 가처분신청 기각
김정숙 여사, 검찰 소환 불응하기로…“무리한 정치탄압”
다 ‘내가 했다’는 명태균, 이번엔 “창원지검장 나 때문에 왔는데…”
탄두가 ‘주렁주렁’…푸틴이 쏜 ‘개암나무’ 신형 미사일 위력은
‘야스쿠니 참배’ 인사 온다는 사도광산 추도식…‘굴욕 외교’ 상징될 판
“영화계 집안사람으로서…” 곽경택 감독 동생 곽규택 의원이 나선 이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