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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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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렁각시의 마리아주

도전, 골뱅이소면
등록 2012-02-03 17:52 수정 2020-05-03 04:26

‘마리아주’란 단어에 겁먹지 않아도 된다. 내가 겁먹어봐서 아니까 하는 소리다. 2007년 가을이었다. 꼬박 만 2년 동안 검사와 판사들의 얼굴을 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 “일응(一應)은” 따위의 일본식 한자어를 주절거리며 폭탄주를 돌려 마시던 어리바리 사회부 기자에게 특급호텔 라운지에서 열리는 프랑스 보르도 와인 시음회는 다른 세상이었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라는 기자 세계의 오랜 격언이 있다. 취재원과 적당한 심리적 거리두기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와인처럼 맛있는 것에 심리적 거리두기를 한다는 게 당최 말이 되냔 말이다. 객관주의는 서초동 개에게나 줘버리라지.
그날 ‘와인을 취재한다’는 문장이 성립하는 것일까 고민하던 신참 음식기자의 또 다른 과제는 ‘마리아주’였다. 케빈 즈랠리가 쓴 (한스미디어 펴냄) 따위를 보고 벼락치기 와인 공부를 한 신참 음식기자가 어쭙잖게 와인잔의 스템(와인잔의 가는 부분)을 잡고 휘청거릴 때, 옆자리 사람들은 그랑크뤼(최고등급 와인)별로 마리아주가 맞는 음식을 논하고 있었다. ‘음식과 와인의 궁합’쯤 되는 단어다. ‘와인이 별거라고 공부하듯 외우고 앉아 있느냐’란 거부감에 얼른 자리를 떴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그러나 마리아주란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도, 우쭐함을 느끼는 것도 모두 우습다. 그건, 그냥 궁합이다. 프랑스에만 있는 것도, 프랑스 사람만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마리아주’라는 프랑스어가 와인 붐을 타고 널리 쓰인 것뿐. 가령 한국말의 ‘안주’는 어떤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按酒’라고 쓰여 있다. ‘안’(按)자는 ‘누르다’라는 뜻이다. 술기운을 누르는 음식이라.
가령 골뱅이소면과 달걀말이, 한 잔의 맥주는 어떤가. 골뱅이소면의 매콤한 맛에 통각이 마비될 정도로 달아오른 혀를 시원한 맥주가 식혀준다. 부드러운 식감의 달걀말이가 다시 혀를 어루만진다. (아차, 이러면 ‘안주-술을 누른다’가 아니라 ‘주안-술이 눌러준다’인가?)

그날 밤 갑자기 출출해졌다. 편의점에 뛰어가 골뱅이캔과 맥주 한 병을 사왔다. ‘82쿡닷컴’의 골뱅이소면 양념장 조리법은 이랬다. ‘양념장: 키위 1개, 고추장 1큰술, 고춧가루 1큰술, 국간장 1큰술, 맛간장 1큰술, 요리술 1큰술, 꿀 1큰술, 설탕 2큰술, 다진 마늘 2큰술, 소금 조금.’ 여기에 국수, 오이·당근 등 채소, 냉면 육수를 섞는다.

불행히도 냉장고에 냉면 육수가 없었다. 키위와 꿀도 없었다. 캔 골뱅이를 흐르는 물에 여러 번 씻었다. 국수도 삶아냈다. 냉장고 문을 열고 하염없이 냉기가 흘러나오도록 우두커니 서 있는데 총각김치가 거의 남지 않은 총각김치통이 눈에 들어왔다. 고추장·고춧가루·마늘 등 갖은 재료로 버물린 총각김치 양념이 바닥에 가득했다. 김치 양념을 가득 퍼서 국수사리에 얹었다. 새큼한 맛이 필요했다. 식초를 조금 넣었다. 마지막으로 된장을 아주 약간 넣고, 비볐다. 막 비볐다. 그리고 편의점에서 사온 맥주 한 잔.

골뱅이소면과 맥주의 ‘주안’상은 나쁘지 않았다. 내가 직접 요리하기 싫은 출출한 밤, 이라는 상황과도 잘 어울리는 음식이었다. 무슨 소리냐고? (마지막 요리 장면 묘사 문단에 주어가 없다는 점을 꼭 말해줘야 알겠나. 그럼 골뱅이소면은 누가 만들었느냐고? 우렁, 아니 골뱅이 각시가 요리를…?)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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