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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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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것이 이기는 것

도전, 안남미 밥짓기
등록 2011-09-30 17:37 수정 2020-05-03 04:26

해외여행을 왔는데 5성 호텔에서의 여덟 끼니와 마트를 여덟 차례 방문하는 것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주저 없이 마트를 택할 것이다. 비용 때문이 아니다. 누군가 호텔 음식값을 내준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가령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뉴칼레도니아 같은 프랑스 문화권을 방문한 사람은 알 게다. 유제품, 빵, 햄과 소시지 등 종류와 양에서 압도하는 음식들을. 마트의 와인 컬렉션의 위압감은 또 어떤가. 벨기에나 독일의 마트보다 못하겠지만, 맥주의 종류도 꽤 다양하다. 진열대 앞쪽에 트라피스트 맥주(벨기에 트라피스트 수도사들이 수백 년 전부터 만들어온 전통 맥주)가 금방 눈에 띌 정도니 말이다. 아, 물론 맥주를 홀짝인 탓에 이번 칼럼 마감 속도가 느려지는 것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뉴칼레도니아는 드라마 로 유명해진 남태평양의 군도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에서 대략 비행기로 한두 시간 걸리는 곳에 있다. 인천공항에서는 8시간 걸린다. 프랑스령이므로 정확히는 ‘누벨(영어의 new)칼레도니’라고 불러야 한다. 그토록 마트를 찬양하지만, 설마 ‘언제 도전해볼까’ 마음먹고 있던 안남미 밥짓기를 뉴칼레도니아에서 도전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9월23일 방문한 마트에서 ‘롱 그레인’(Long grain)이라고 큼직하게 적힌 안남미를 발견했다. 옆칸에는 인스턴트 베트남 쌀국수도 있었다. 말린 소시지에 해당하는 소시송(saucisson)과 보통의 햄과 비슷한 소시스(saucisse)를 반찬으로 샀다.

‘대체 훅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안남미로 어떻게 밥을 짓는단 말인가’라고 생각하며 느꼈던 약간의 긴장감은 리조트에서 인터넷 검색을 하는 순간 사라졌다. 단순했다. ‘1. 한국에서 밥 지을 때와 물은 비슷하게. 2. 뚜껑을 연 채로 센 불에 끓인다. 3. 자작자작 끓는 순간 약불에 놓고 10분간 뜸을 들인다. 4. 덜 익었으면 물을 조금 더 붓고 좀더 끓인다.’(델리쿡 참조)

흰 곰팡이가 가득한 소시송의 껍질을 벗겨 썰고 소시스는 썰어 양파와 살짝 볶았다. 리조트 주방에서 물을 끓여 인스턴트 쌀국수에 부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어제 저녁 2인분에 1만퍼시픽프랑(약 10만3천원) 하던 호텔 저녁밥보다 열 배는 나았다. 뉴칼레도니아 양파는 한국의 양파보다 훨씬 매운맛이 강했다. 그 덕에 소시스의 돼지기름 냄새를 훌륭하게 잡아줬다. 안남미는 과연 풀풀거렸다. 우리나라처럼 밥공기에 담았다면 먹기 불편했겠지만 접시에 담아 먹기에는 그다지 불편함이 없었다. 좀 창피한 말이지만 인스턴트 쌀국수에 완전히 반해버렸다. 한국의 어떤 컵라면보다 나았다. 유탕면이 아니어서 면이 느끼하지 않았고, 쇠고기 안심이 진공포장돼 있어 먹을 만했다. 그날 저녁 식사의 옥에 티는 소시송이었다. 밥과 어울리지 않았다. 요리책에서 읽은 대로 와인 안주로 어울릴 것 같다.

흔히 뉴칼레도니아에 대해 ‘천국 바로 다음’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베트남 사람들은 프랑스 식민 치하 시절인 1900년대 초반 ‘천국 바로 다음 가는 섬’으로 이주해 막노동을 했다. 1975년 호찌민이 베트남 독립정부를 세운 뒤 일군의 베트남인들이 다시 한번 뉴칼레도니아로 왔다. 그들은 뉴칼레도니아 전체 인구 24만9천 명 가운데 1.4%를 차지한다. 안남미와 쌀국수가 뉴칼레도니아에 흔한 이유다.

뉴칼레도니아 안남미와 쌀국수의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이런 역사를 떠올리기에 음식 맛이 너무 좋았고, 바람은 지나치게 기분 좋았으며, 햇볕은 적당히 따뜻했다. 결국 맛있는 것이 이기는 것 같다.(좋건 나쁘건) 결국 이번 칼럼도 결코 역사 칼럼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뉴칼레도니아=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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