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고나무
독신남은 맛을 모른다. 이렇게 말한다면 주위 시선 아랑곳 않고 식당에 갈 때마다 수저나 포크보다 디지털카메라를 먼저 꺼내드는 숱한 맛집 블로거들이 발끈할지 모른다. 흥분 가라앉히시라. 내 얘기가 아니다. 미국의 저명한 음식저술가라는 메리 프랜시스 케네디 피셔라는 분의 주장이다. 좀 길지만 그의 책 (The art of eating)을 인용해보자.
“독신남들이 미식에 접근하는 태도는 기본적으로 성적(Sexual)이다. 79살 밑의 독신남 가운데 예쁜 여성을 위한 식사가 아닌 한 괜찮은 끼니를 만드는 수고를 감수할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음식의 최음제적인 측면을 의식적으로 고려하는 독신남은 거의 없다. 하지만 잠재의식에서는 가능한 한 티나지 않게 그들의 성찬을 그토록 바라 마지않는 (여성과의) 동침으로 이끌어줄 온갖 묘책을 사용하려 한다.”
요약하면 ‘독신남은 껄떡거릴 때만 제대로 요리한다’쯤 되겠다. 1908년에 태어나 두 차례의 세계대전까지 겪으신 이 누님(?)은 자신이 경험한 최악의 껄떡거림을 소개했다. 요리는 근사했고 술은 최고급이었다. 진짜배기 전문가들이 만든 요리가 한 상 가득했다. 남자는 자신의 취향이 아닌 피셔의 입맛에 맞춰 칵테일을 준비했다. 적당히 차게 한 티오페페(스페인의 식전주)를 홀짝이는 피셔의 눈앞에 촛불이 흔들거렸다. 은식기, 중국제 접시, 스웨덴제 유리잔이 보기 좋게 배치됐다. 본격적으로 식사가 시작되자 이탈리아의 키안티 와인이 제공됐다. 두 사람은 빵가루와 파르마산 치즈에 잰 송아지고기 요리를 먹었다. 밤하늘엔 별이 반짝였고, 남자의 갈색 눈동자도 반짝였다. 그리고 피셔는 그날밤을 최악으로 기억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남자는 메뉴를 짤 때 날씨를 고려하지 않았다. 가장 무덥고 습한 여름밤에 남녀는 뜨겁고, 기름지고, 위에 부담을 주는 식사를 했다. “입덧이라도 한 것처럼 구역질이 났다”고 피셔는 썼다. 또 한 가지는? “물론 가장 큰 실수는 그런 상황에서도 그가 나를 즐겁게 하려고 계속 시도한 것이었다. 마치 아직 나를 유혹할 여지가 있고, 자신은 독신남이라도 된 것처럼. 우리 둘 다 몇 달 전에 결혼한 몸이었다.”
말하자면 요새처럼 덥고 습한 날에 여자를 유혹하기에 현란한 파스타보다 복숭아 생과일주스 한 잔이 나을 수 있다는 거다. 집 근처 마트에서 한 개에 약 700원짜리 복숭아를 두 개 샀다. 깨끗이 씻고 껍질을 벗긴 것까진 좋았지만 문제는 믹서였다. 2년 만에 찬장에서 꺼낸 믹서는 전역을 한 달 앞둔 병장처럼,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놀랍게도 생과일주스 만드는 데 과도 하나로 충분했다. 5분간 쉴 새 없이 칼질을 했더니 과육이 점점 작아졌고 즙이 배어나왔다. 물을 좀 섞고 얼음을 띄웠다. ‘이런 주스로 누굴 꼬인단 말인가’라는 생각이 든 것 외엔, 그럭저럭 마실 만했다.
여자를 유혹할 때 고려해야 할 날씨와 메뉴의 관계에 대해 궁금한 독신남은 나 말고 피셔에게 문의하시길. 아 참, 1992년에 돌아가셨으니 답신은 어려우시려나.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산 정상에 기름을 통째로…경찰, 화성 태행산 용의자 추적
4월 탄핵 선고 3가지 시나리오…윤석열 파면·복귀, 아니면 헌재 불능
냉장고-벽 사이에 82세 어르신 주검…“얼마나 뜨거우셨으면”
[단독] ‘내란’ 김용현, 군인연금 월 540만원 받고 있다
“기온 뚝, 얇은 이불에 잠 못 이뤄”…이재민 불안한 텐트 생활
최상목, 2억 상당 ‘미 국채’ 매수…야당 “환율방어 사령관이 제정신이냐”
“외딴집 이틀째 연락 안되더니”…경북 북부 산불 희생자 26명으로
조국혁신당 “마은혁 월요일까지 임명안하면 한덕수 탄핵”
‘파기자판’ 뭐길래…국힘, ‘이재명 무죄’에도 왜 물고 늘어질까
한국도 못 만든 첫 조기경보기 공개한 북한…제 구실은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