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교과서를 읽다 무릎을 쳤다. 무릎만 치기 아까워 허리를 돌리며 춤을 췄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시체를 목격한 일은 잊힐 수도 있겠지만 햄릿의 죽음은 영원히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예술에 의해 형식화되지 않은 인생 그 자체는 혼란스러운 경험으로 남아 있을 뿐”이라고 미국인 저자는 썼다. 이야기가 삶을 살 만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나는 해석했다.
며칠 전 내가 꼭두새벽에 만든 새우미역국은 햄릿의 죽음에 해당할까? 그날 누군가를 축하해야 했는데, 불행히 저녁에 술자리 약속이 있었다. 다음날도 빈틈이 없었다. 새벽 5시에 눈을 떴다. 미역국은 내가 만들어본 모든 국과 찌개 가운데 가장 간편한 녀석에 해당한다. 당면에 고추기름을 신경 써야 하는 육개장의 번거로움이나, 된장 맛이 전체 맛을 좌우하는 ‘근본주의적 음식’ 된장국, 김치 맛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김치찌개와는 차원이 다르다. 졸린 눈을 비비며 새우와 참기름을 미리 조금 달군 냄비에 볶았다. 살짝 볶는 게 핵심이다. 물을 붓고 마른 미역을 툭툭 꺾어 넣었다. 다진 마늘을 넣고, 멸치액젓이 없어 냉장고에 굴러다니던 멸치육수 농축액으로 간을 했다. 끄덕끄덕 졸다 간을 보니 싱거웠다. 양조간장을 좀 넣었다.
군대에서 선임들이 가르쳐준 미역국 조리법은 역시 엉성했다. ‘다음 미즈쿡’은 “간장으로 색과 맛을 낸 다음 소금으로 간을 맞춰야 더욱 진하고 맛있다”라고 설명한다. 미역도 미리 불려놨어야 했다. 전날 얼큰히 취해 새벽 1시에 잠들었다 4시간 자고 일어난 남자에게는 무리한 조리법이었다.
그러므로 거금도 미역 덕분이었을 게다. 볶는 단계에서 간장을 넣지 않아 색이 좀 거무튀튀했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했던 이유는. 자 이제 질문이 남는다. 첫마디의 명언을 빌려 되물어보자. 길거리에서 우연히 먹은 미역국은 잊힐 수도 있겠지만, 내가 만들어준 새우미역국은 영원히 (그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까? 사람들은 미역국 하면 쇠고기미역국을 떠올린다. 내가 미역국에 새우를 넣는 순간, 길거리 시체가 햄릿의 죽음으로 승화됐다. 새우는 내가 축하해줘야 할 사람이 좋아하는 식재료였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식재료를 기억해내고, 그 식재료로 미역국 조리법을 변주하는 순간 나의 새우미역국은 이야기가 됐다. 추상적 미역국이 구체적 새우미역국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의미 없는 체험에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 이야기다. 서점에 널린 게 요리책이지만, 대부분 정보서다. 요리 정보가 전제하는 이야기 요소는, 말하자면 ‘아이에 대한 사랑’ 내지 ‘남편에 대한 헌신’ 같은 진부한 것들뿐(수많은 요리책의 표지를 보시라). 어떤 조리법도 소개하지 않는 요리 에세이나 요리 문화사 책이 제법 팔리는 데는 이유가 있는 거다.
그러니까 새우미역국 뒷이야기는 묻지 마시라. 정작 축하받을 사람은 한 숟갈만 먹고, 나머지 미역국은 내가 해장국으로 다 흡입했다거나, 냉동실에서 쇠고기를 찾다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냉동새우를 꺼내든 것이 새우미역국의 출발이었다는 사실은, 이야기가 아니라 작가 후기 같은 것에 불과하니.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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