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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고의 맛은 짜다

도전, 양고기 자장 ②
등록 2011-07-01 16:51 수정 2020-05-03 04:26
한겨레21 고나무

한겨레21 고나무

불이 문제다. 중국요리에는 고온에 순식간에 볶는 조리법이 많다. 내가 취재했던 많은 중식 주방장들은 불과 관련해 잊지 못할 추억을 갖고 있었다. (여성자신 펴냄)에도 ‘고온에 잠깐 볶으라’라는 충고가 나왔다. 쟁점이 첨예한 사건의 경우, 어떤 판사들은 정반대 결론의 판결문을 제각각 써본다. 양손에 정반대 판결문을 쥔 판사에게 조언은 결국 조언일 뿐이다.

자장면 조리를 시작하자마자 고민하는 판사가 된 기분이었다. 시키는 대로 냄비를 미리 달구고 해바라기유 2큰술을 둘렀다. 춘장을 넣고 3초가 지나자 ‘젠장, 센 불은 얼어죽을!’이라고 중얼거리며 급하게 2단불로 줄였다. 짧은 시간 온 집안에 춘장의 짭짤매캐한 냄새가 퍼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냄비 바닥에 시커멓게 춘장이 달라붙었다. 오리지널 춘장은 예상보다 점성이 높고 되직했다. 중식당에서 흔히 맛보는 짙은 갈색에 달콤한 냄새가 피어나는 자장은 없었다. 냄비에 쉴 새 없이 달라붙는 춘장을, 쉴 새 없이 숟갈로 저어야 했다. 춘장은 중국식 된장이다. 된장에 소금을 넣어 만드는 발효식품이다. 본질적으로 한국 된장과 다르지 않다. 냄비에서 나는 춘장의 짠 탄내는 그 사실을 일깨워줬다.

감자, 양파, 고추를 적당한 크기로 썰었다. 춘장 포장지는 돼지고기를 볶으라고 충고했다. 자장은 중국 음식이지만 바다를 건너 사실상 한국 음식이 됐다. 식재료는 바다와 대륙을 마구 건넌다. 그러므로 냉동실에서 양고기를 꺼냈다고 ‘그러지 마시라’고 충고할 독자는 없을 게다. 몇 주 전 시시케밥을 만들때 이태원 이슬람 식재료 상점에서 사둔 ‘할랄’ 양고기다. ‘할랄’은 이슬람 전통 예법에 따라 도축했음을 일컫는다. 양고기를 썬 뒤 물이 담긴 그릇에 넣어 핏물을 뺐다. 썬 고기를 올리브유, 양파즙, 소금에 버무렸다. 시시케밥에 도전할 때 배운 양고기 비린내를 없애는 법이다.

춘장 포장지는 ‘마지막에 녹말가루를 물에 풀어넣고 한 번 더 끓이라’고 충고했다. 나는 충고에 따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집에 녹말가루가 없었다. ‘녹말을 안 넣으면 어떤 맛이 날까’라는 호기심도 작용했다. 볶은 춘장과 따로 볶은 고기와 채소를 합쳐 물을 붓고 되직해질 때까지 약불에 끓였다.

고소한 양고기 기름 덕에 춘장의 강한 짠맛이 좀 죽은 것은 다행이었다. 마트에서 산 국내 업체의 춘장에는 감미료인 ‘효소처리스테비아’가 들어 있었다. 감미료를 생각해 설탕을 넣지 않은 것도 적절한 선택이었다. 센불 대신 중불에 볶고, 돼지고기 대신 양고기를 썼지만 나쁘지 않은 맛이 났다. 다만, 좀 짰다. “너 5살 때 처음 자장을 만들었는데, 그땐 지금처럼 ‘ㅅㅈ표’ 춘장 같은 게 없어서 동네 시장에서 숟가락으로 퍼서 파는 춘장을 샀지~. 자장 만들 때 핵심은 녹말 농도 조절이야. 너무 묽으면 자장 같지 않고, 너무 되면 짜고 쓴 맛이 나거든.” 1980년대 초 머나먼 제주에서 처음 자장에 도전했던 어머니는 녹말이 핵심이라신다. 아차 싶었다. ‘충고는 충고일 뿐’이라는 내 태도가 바뀌진 않았다. 최소 세 끼 이상 짠맛 나는 양고기 자장밥을 먹어치워야 한다는 현실이 내 선택의 몫일 따름. 충고의 맛은 짜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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