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턴트 음식은 사실 음식의 이상향이다. 가령 ‘설렁탕 한 그릇의 영양이 그대로 담긴’ 인스턴트 라면이 있다고 치자. 더 빨리, 더 영양가 있게, 더 몸에 좋게! 이건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라는 올림픽 정신과 통한다. 좌고우면하지 않는 욕망의 순수한 추구. ‘참가하는 데 의의가 있어’라는 태도도 나쁜 건 아니지만, 올림픽 정신에는 ‘네가 그걸 할 수 있든 없든 저 앞에 너의 의지와 상관없이 목표가 있고 넌 거기에 육박해 가야 해, 그게 선수야’라는 단순무식함이 배어 있다. 내 어떤 면은 거기 끌린다.
그러니까 올림픽 정신을 ‘인스턴트 정신’으로 바꿔도 틀린 말은 아니다. 더 빨리, 더 몸에 좋은 음식을, 더 맛있게 만들자는 게 뭐가 나쁜가. 그러니 인스턴트 음식을 덮어놓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좀 재수없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특히 비난 발언을 자칭 ‘미식가’가 하신다면 더욱.
오징어냉국도 말하자면 인스턴트 음식이다. 김지순의 (대원사)은 “지난날 제주도의 농촌에서는 여름철 밭일을 나갈 때 재료와 생수를 준비하여 갔다가 즉석에서 냉국을 만들어 먹곤 하였다”고 설명한다. ‘냉면’과 ‘냉국’ 모두 ‘냉’자가 들어가고 국물이 있지만 넘을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 냉면 육수는 오랜 시간 뼈를 우린 뒤 식혀 동치미 국물과 배합하는 등의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친다. 오징어냉국은 그런 농경문화적 머뭇거림이 전혀 없다.
오징어, 깨소금, 오이, 토장, 깻잎, 식초, 부추, 설탕, 풋고추, 청장, 고춧가루, 파, 마늘을 준비한다. 오징어는 데쳐서 채썰고, 오이·양파·깻잎도 채썬다. 부추는 3cm 길이로 썬다. 오징어와 다른 양념들을 된장과 골고루 무친 뒤 냉수를 붓는다.( 참조)
‘된장과 무친 뒤 냉수를 붓는다’라는 문장에 주목해주기 바란다. 국물은 반드시 끓여서 만들어야 한다는 한반도 농경민의 강박에서 해방된 저 단순무식한(?) 아름다움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반드시 오징어냉국을 이번주 안에 만들어보시라. 참고로 나는 마감날 오전 아침에 부랴부랴 집 근처 시장에서 오징어와 깻잎만 사서 만들었다. ‘오징어 데치기 10분+냉장고에 있던 고추·양파와 깻잎 썰기 10분+버무리고 냉수 붓기 5분=25분’으로 충분했다. 마감 직전에 해먹는 음식을 인스턴트라고 부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식초를 충분히 치는 것만 잊지 않는다면, 맛도 제법 괜찮다. 식초를 넣지 않으면 된장의 텁텁한 맛이 혀끝에 맴돈다. 심지어, 오징어를 제외한 모든 음식 재료가 어떤 변형 없이 그대로 담겼다. 올림픽 정신에 육박한다. 어머니가 여름 때마다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오징어냉국을 만들었던 이유도, 아마 거기 있을 게다. (어머니, 그 이유 말고 혹시 몰래 놀러나가시…?)
‘제대로 된’ 인스턴트 음식 만들기가 어려운 이유는, 이상향이 도달하기 어렵고 올림픽 메달은 3개뿐이라는 사실과 이유가 같을 게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최근 ‘신라면 블랙’ 선전이 과장 광고라고 결정하고 과징금을 매겼다. 농심이 진짜 선수라면, 일단은 심판 판정에 수긍을.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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