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빚진 게 있다. 목숨이 명멸하는 상황에서 ‘빚’ 따위의 단어를 떠벌리는 건 싸가지 없잖냐고 해도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나 같은 B급 개인주의자가 볼 때 인간은 더듬이가 없어 곤충보다 열등하다. ‘타인의 고통을 내 것으로 여기라’는 문장은 숭고하지만 현실에서는 잘 벌어지지 않는다. 증오의 언어가 넘치는 한국에서 갑자기 성스러운 언어가 넘친다. 어쨌든 모두 앞다퉈 바다 건너 이웃을 돕는 비현실적으로 희망적인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빚 따져보기는 이 희망을 두텁게 하자는 취지다.
카레라이스
1. ‘개인’ ‘사회’ ‘권리’라는 단어 없이 개인주의자를 설명할 도리가 없다. 19세기 말 일본 학자들이 ‘society’를 ‘사회’로 번역해주지 않았다면? 그들이 ‘개인’이라는 번역어를 발명하지 않았다면? 마루야마 마사오의 에 따르자면, 모든 개인주의자는 일본에 빚졌다.
2. 30여 년 살면서 유일하게 네 번 반복해 본 영화도 일본 영화다. 은 볼 때마다 허파에 드라이아이스를 집어넣은 것처럼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이누도 잇신 감독은 무사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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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980년대 초 변방의 섬소년에게 저렴하게 오락실 역할을 해준 ㄱ출판사의 싸구려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도 빚 중 하나다. 그런 유의 문학전집이 일본어 전집의 중역임은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
4. 무엇보다 일본은 나를 먹여살렸다. 돈가스와 카레라이스와 단팥빵이 없었다면 한국의 소년들은 어떻게 자랐을까? (오카다 데스)을 보면, 돈가스, 카레라이스, 단팥빵은 외국 문화를 자기 것으로 체화하는 일본 문화의 상징이다. 셋 다 메이지유신이 남긴 3대 발명품이다.
5. 재즈는 흑인음악에 뿌리를 둔다. 미국 문화가 쿠바에 진 빚이 컸기에 작가 노먼 메일러는 1960년대 케네디 행정부가 피그만을 기습 공격했을 때 이렇게 일갈했다고 전해진다. “당신한테 쿠바에 대해 강의해준 놈이 한 놈도 없었어? 그 나라 음악도 이해 못하면서 쿠바를 침공하다니!”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메일러의 표현을 빌려 “조선도 이해 못하면서 조선을 침공하다니?”라고 돌려줘도 좋다. 가족을 잃은 일본인을 보면서 ‘복구산업 주가 상승’ 따위를 먼저 나불거리는 한국인에게도 “당신한테 일본 카레에 대해 강의해준 놈이 한 놈도 없었어?”라고 돌려줘도 무방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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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커리는 강황, 코리앤더 등 수십 가지 향신료의 혼합물이다. 4인분 기준 레시피를 보며 나는 감자를 썰기 시작했다. ‘양파 1/2, 감자 1/2, 당근 1/2, 새송이버섯 1개, 쇠고기 반줌, 올리브유 2큰술, 물 5겁, 카레 1봉을 준비한다 → 엄지손톱 크기로 각각의 재료를 썬다. 식용유를 넣고 볶는다 → 겉이 익고 향이 나면 물을 붓고 팔팔 끓인다 → 카레 가루를 뜨거운 물에 먼저 섞어둔다 → 카레 갠 것을 볶아둔 채소와 고기에 붓고 약불에 5분간 끓인다.’(다음 미즈쿡)
나처럼 요리 실력이 없어도 카레라이스는 대략 맛있다. 성금 보내기 사이트를 찾기 위해 마우스를 뒤적이며 나는 다시 카레라이스를 한 수저 욱여넣었다.
고나무 기자 한겨레 정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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