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울프(1955∼)는 서적과 음반 등을 그대로 모사하는 2류 미술가다. 작품마다 완성도는 차이가 있지만, 대개 실물인 척 가장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즉 예전의 유럽 화가들이 평면의 캔버스 너머로 공간이 존재하는 듯 보이도록 눈속임(trompe l’oeil) 기술을 구사했던 것과 달리, 이 미국인은 보는 이에게 재현품을 모델이 된 사물 자체로 착각하게 만드는 눈속임 기술을 구사한다.
1997년 작 (Untitled: Cubism and Abstract Art)도 그런 재현의 예술로 관객을 홀린다. 얼핏 낡은 도록으로 뵈지만, 실제로는 정교하게 제작된 일종의 복제품 조각이다. 다음은 작가의 설명이다.
“당신이 바라보는 것은, 진짜 책의 모양새를 따라, 조각용 풀로 접착한 나무와 캔버스 보드에 종이 커버를 둘러놓은, 오브제다. 종이의 갈색 바탕은 손으로 칠했다. 하단의 붉은 띠는 본디 리소그래프 인쇄를 했는데, 나중에 유채 물감으로 덧칠했다. 반면 다이어그램은 온전히 리소그래프 인쇄다. 책 옆면은 모서리에 유채 물감을 바른 뒤, 빳빳한 붓으로 마르지 않은 물감을 쓸어서 결을 표현했다. 그다음엔 얼룩을 그려 넣어서 낡고 빛바랜 책의 느낌을 살렸다.”
한낱 눈속임에 불과한 울프의 이 모사한 대상은,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초대 관장인 알프레드 바 주니어가 1936년 기획한 전설적 전시 ‘큐비즘과 추상미술’의 도록이다.
프랑스인들이 큐비즘을 역사적으로 평가하는 일을 망설이는 동안, 미국인들은 적극적으로 작품을 수집했고, 또 전시를 기획했다. ‘큐비즘과 추상미술’전은 시점도 절묘했다. 독일을 장악한 나치 정권이 이듬해인 1937년 ‘퇴폐미술’(Entartete Kunst)전을 기획해 추상미술을 탄압했기 때문에, 뉴욕 현대미술관은 한동안 나치의 프로파간다 미술에 맞서는 추상미술의 수호성인처럼 보였다.
바 주니어 관장은 이 전시에서 추상미술의 전개 과정을 변증법적으로 정리해 입체파 미술의 중요성을 밝혔고, 그 얼개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다이어그램을 제시해 도록 표지에 게재했다. 이 도표는 지금까지도 미술대학 교과과정에서 현대미술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데, 긍정적 의미에서라기보다는 비판적 독해 대상으로 소환되는 것이 보통이다.
1960년 말 대두된 문화이론이 1980년대 미술사 연구에 유입된 이래, 새로운 세대의 시각문화 연구자들은 바 주니어의 역사 도해를, 모더니스트의 죄과를 상징하는 도상으로 활용해왔다. 그들은 ‘역사의 선형적 이해 방식’과 ‘정전(canon) 만들기’가 타자들의 목소리를 억압하고 사실을 왜곡한다며 질타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므로 울프의 은 다층적 질문이 된다. 과연 바 주니어가 제시한 연구 결과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어떻게 활용됐나? 그를 비판한 신미술사학의 주장은 어디까지 진실이고 거짓인가? 진짜 도록을 전시장에 비치하는 것과 이 모사품을 전시하는 일은 어떻게 다른가? 레디메이드의 ‘발견된 오브제’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 이는 역사적 사물의 이미지를 수집하는 작업인가?
한때 모더니스트들이 시대착오적 방법이라고 지탄했던 눈속임 기술로, 모더니즘의 역사관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전시 도록을 모사한 일은, 포스트모던한 제스처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런 역사적 농담을 뉴욕 현대미술관이 소장했으니, 유력한 제도기관이 자신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꼴이 됐고, 소장품엔 각별한 의미가 부여됐다. 만약 바 주니어가 저승에서 이를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미술·디자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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