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발밑에 깔린 조각품

갤러리에 들어선 관람객 발밑에 깔린 판재가 작품인 칼 안드레의 <구(舊) 도심 사각형>… 원소 주기율표에 사로잡혔던 미니멀리즘 작가의 비극적 말년
등록 2011-09-02 18:15 수정 2020-05-03 04:26
칼 안드레의 <구(舊) 도심 사각형(Altstadt Rectangles)>(1967)은 버려진 건물 사이의 공간을 막고 그곳을 작품이라 주장했다.
 ⓒ Carl Andre/ Licensed by VAGA, New York, NY.

칼 안드레의 <구(舊) 도심 사각형(Altstadt Rectangles)>(1967)은 버려진 건물 사이의 공간을 막고 그곳을 작품이라 주장했다. ⓒ Carl Andre/ Licensed by VAGA, New York, NY.

1967년 10월21일 독일의 화가 콘라트 루에크(1939∼96)가 부인과 함께 콘라트피셔갤러리를 열었다. 1963년 지그마 폴케, 게르하르트 리히터와 함께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주창하며 독일식 팝아트를 시도한 ‘루에크’는, 어머니의 성을 사용하던 치기를 버리고 다시 아버지의 성을 따라 ‘피셔’가 됐다. 작가 노릇을 그만둔 그는, 이후 동료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대리인의 삶을 살았다. 갤러리가 초청한 첫 작가는, 미국의 미니멀리즘 조각가 칼 안드레(1935∼)였다.

그러나 개막일 콘라트피셔갤러리의 작은 전시장에 발을 들여놓은 관람객 다수는, 텅 빈 공간에서 미술품을 찾지 못해 당황했다. 작품은 이미 그들이 밟고 서 있었다. 제목은 (1967)이었다. 가로와 세로의 길이가 50cm인 열간압연강(Hot-rolled Steel) 100장을 갤러리 바닥에 가지런히 배열해놓은 게 전부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제 발밑에 있는 판재가 바닥재라고 생각했지, 조각품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후일 거물급 화상이 된 콘라트 피셔지만, 당시엔 돈이 없었고, 갤러리라고 해봐야 구(舊) 시가지 건물 사이에 버려진 터널 모양의 공간을 틀어막고 길가 쪽에 유리문을 달아놓은 게 전부였다. 작품 운송비나 보험료를 감당할 수 없었기에 피셔는 가장 싼 비행기 티켓으로 칼 안드레를 초빙했다. 갓 도착한 작가에게 페인트통과 페인트붓을 쥐어주며 건넸다는 이야기도 걸작이다. “칼, 자네가 바닥을 빨리 칠해야 더 빨리 작업을 설치할 수 있다네.”

1965년 작품을 처음 발표하며 조각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칼 안드레는, 알루미늄·강철·아연·구리·마그네슘·주석 등 금속 판재로 단순한 조합의 편평한 조각을 제작하는 것으로 이름이 높다. 미술 창작을 본격화하기 전엔 구체시(Concrete Poetry·시문의 핵심 내용이나 주제를 조형적 형태로 드러내는 시 형식을 일컬음) 등을 쓰며 물질의 개념적 차원을 탐구했고, 미니멀리즘 화가 프랭크 스텔라(1936~)와 (훗날 아방가르드 영화감독으로 명성을 날린) 시인 홀리스 프램프턴(1936~84)과 교유하며 새로운 조각예술의 가능성에 눈떴다.

1960년대 초, 칼 안드레와 홀리스 프램프턴은 물질의 성분만을 소장하고 전시하는 박물관을 꿈꿨는데, 그들은 재료의 물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형식을 취하기 희망했고, 구겐하임미술관과 유사한 나선형 구조를 상상했다. 물질의 본성에 관심이 많던 청년 안드레를 사로잡은 것은 원소의 주기율표였다.

1868년 말 러시아 화학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가 무기화학 교과서 를 저술하려고 당시 알려진 63종 원소의 배열 순서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주기율을 발견했고, 그를 정리해 1869년 최초의 주기율표를 발표했다. 그런 주기율표를 구체시로 바라보면, 마치 물질계의 신비를 드러내는 원소의 시문 혹은 만트라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칼 안드레는 주기율표를 바탕으로 다양한 조합의 미니멀리즘 조각을 제작했다. 은 그 대표작인데, 어쩌면 이는 상상 속 물질 박물관의 한 섹션을 미리 실현해본 결과일지 모른다. 열간압연강의 특질을 온전히 드러내는 형태를 다시 성분표와 유사한 형태로 배치해놨으니 말이다.

1965년 데뷔 이후 청년 작가 칼 안드레의 커리어엔 거침이 없었다. 1966년 뉴욕 유대인박물관에서 열린 미니멀리즘 미술가들의 그룹전 ‘기본 구조’(Primary Structures)에 137장의 내화벽돌을 쌓아놓은 (Lever·1966)를 출품해 파란을 불러일으킨 것이 명성의 시작이었다. 1969년엔 예술노동자연합(Art Workers Coalition)을 조직했고, 1970년엔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당시 그의 미술사적 위상은 여타 경쟁관계에 놓인 미니멀리즘 작가들을 압도했다.

하지만 1985년의 비극적 사건 이후 칼 안드레에게 찍힌 ‘살인자’ 낙인은 그의 숨통을 좼다. 그간 어떤 주요 미술관도 그의 회고전을 개최하지 않았고, 카탈로그 레지오네(전작집)도 가까스로 올해 출간됐다. 법정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은 믿는다, 그가 세 번째 부인이자 쿠바 출신의 동료 작가인 아나 멘디에타(1948∼85)를 34층 아파트의 창밖으로 밀어 떨어뜨려 살해한 범인이라고.

미술·디자인 평론가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