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현대미술관, 파리의 퐁뇌프다리, 독일 국회의사당 따위를 포장하는 대형 프로젝트로 명성을 떨친 크리스토 야바체프(1935~)는, 흔히 ‘대지미술(Land Art, Earthworks)의 선구자’로 분류된다. 하지만 자고로 분류되는 존재는 분류하는 체계와 갈등하는 법. 즉, 크리스토(와 아내 장클로드)의 작업이 딱히 대지미술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대지미술이란 개념의 창시자로 꼽히는 인물은, 36살에 요절한 로버트 스미슨(1938∼73)이다. 그는 황무지와 호수 등 야외에서 작업했고, 1968년 에세이 (The Sedimentation of the Mind: Earth Projects)를 발표해 대지미술의 비평적 기초를 제시했다. 이후 리처드 롱, 마이클 하이처, 낸시 홀트, 크리스토 야바체프 등이 뒤를 이었고 한때 ‘환경미술’(Environmental Art)이란 좀더 융통성 있는 단어가 애용됐다.
1950년대 말 시작된 크리스토의 포장 작업은 특정 오브제를 감싸는 수준이었다. 1962년 쾰른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땐, 백남준의 피아노 두 대를 허락도 없이 포장해 작품으로 제시했다가, 피아노 주인의 항의를 받고 반납했다는 우스운 에피소드도 전한다(전시 마지막 날 피아노를 돌려받은 백남준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거리낌 없이 크리스토의 포장을 해체해버렸단다.)
데뷔전을 치른 뒤 파리로 활동 기반을 옮겨, 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가 1961년 창시한 ‘누보 레알리슴’(Nouveau Realisme) 운동에 참여했다(누보 레알리슴을 ‘미국의 팝아트에 대한 프랑스식 화답’이라고들 하는데, 결국 ‘프랑스판 유사-팝아트’란 뜻이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레스타니 일파의 유사-팝아트적 경향과 달랐고, 1970년대엔 누보 레알리슴으로 분류되기를 단호히 거부했다.
크리스토와 장클로드가 포장 작업을 환경미술 수준으로 대형화한 것은 1968년의 일로, 전설적 큐레이터 하랄트 제만의 덕을 크게 봤다. 1967년 스위스 베른미술전시관 관장이던 제만은, 미술품이 전시되는 공간을 새로운 환경으로 재정의하는 작품을 모은 그룹전을 준비했고, 크리스토 등에게 신작을 의뢰했다. 크리스토는 베른미술전시관을 통째로 포장하는 괴작을 제안했는데, 놀랍게도 제만은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1968년 7월20일 개막한 기획전의 제목은 ‘열두 가지 환경- 베른미술전시관 50주년 기념전’(12 Environments- 50 Jahre Kunsthalle Bern)이었고, 콘라드 루엑, 귄터 웩커, 프로젝트 그룹 ERG, 앤디 워홀 등 14명(팀)이 참여했다. 모두 1만1512명이 관람한 이 전시에서 크리스토의 대작 (Kunsthalle Bern, Wrapped·1967~68)은 단연 화제였다.
2340m²의 폴리에틸렌 재질 백색 천과 3050m의 나일론 밧줄로 포장한 미술전시관의 모습은 초현실적 장관이었고, 비평적 효과도 대단했다. 미술관을 재료로 사용한 ‘최초의 장소 특정적 설치미술’로 꼽히는 이 작품은, 즉물적 형태로 ‘미술전시관의 존재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문화제도에 예술적 논평을 가한 셈이었다.
하지만 11명의 노동 인력을 투여해 6일 만에 완성된 은 전시 개막 7일 뒤 철거됐다. 보험사에서 포장 작업으로 인한 화재 가능성을 제기해, 건물과 미술품의 안전을 문제 삼았기 때문이다. 미술관 쪽은 건물 주변에 안전요원 6명을 24시간 배치해 버텼지만, 인건비로 너무 많은 경비가 소요돼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제만의 초청으로 성사된 이 기념비적 프로젝트는, 이듬해인 1969년 (Chicago Museum of Contemporary Art, Wrapped)으로 이어졌다. 크리스토(와 장클로드)는 이번엔 방수포와 밧줄로 미술관을 (안전하게) 감쌌다. 이후 듀오의 포장 프로젝트는 해안과 계곡, 골짜기와 도심 곳곳으로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추신: 1961년 크리스토와 장클로드는 첫 협업을 했고, 평생을 예술적 동반자로 함께했다. 그런데 장클로드는 자신의 작업 을 두 눈으로 보지 못했다.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된 프로젝트를 감당하기 위해 당시 장클로드는 이탈리아 스폴레토에 머물고 있었다. 물론 남편도 아내가 포장한 분수와 중세 첨탑의 아름다운 모습을 직접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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