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20일 독일 베를린 신국립미술관에서 개막한 ‘베를린에 온 모마’(Das MoMA in Berlin)는,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이 2002년 6월29일 전시 공간 확장을 위해 증축 공사에 돌입했기에 가능한 특별한 전시였다. 전시 홍보 문구는 “모마는 스타다!”(Das MoMA ist der Star!)였다. 베를린 시민에게 현대미술의 ‘스타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세기의 기회’로 소개된 이 전시에서, 가장 주목받은 ‘스타 중 스타’는 어떤 작품이었을까?
운송과 설치 과정에서 홍보와 전시 안내에 이르는 전 과정까지 최고의 스타 대접을 받은 작품은 색면추상화의 거장 바넷 뉴먼(1905~70)이 제작한 대형 조각, (Broken Obelisk·1963~69)였다.
높이 774.5cm에 달하는 뉴먼의 철제 기념비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바닥에서 살짝 떨어진 정사각형의 낮은 기단에 올라선 하단부는 피라미드 형태고 상단부는 부러진 오벨리스크를 거꾸로 세워놓은 형상이어서, 피라미드와 오벨리스크가 서로 뾰족한 꼭짓점을 맞대고 선 꼴이다. 두 부분은 특수 강철봉으로 연결되고 지탱되는데, 오벨리스크 쪽에 고정된 강철봉을 피라미드 쪽 구멍에 맞춰 꽂으면 설치가 완료되는, 비교적 간결한 구조다. 녹이 스는 내후성 강판(Cor-ten Steel)을 용접해 만들었기에, 마치 문명 이후의 모습을 웅변하는 듯 음울한 비장미를 풍긴다.
도상적 측면을 보면, 는 오벨리스크와 피라미드라는 고대 이집트의 기념비에 관한 기념비다. 고대 기념비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작가에게 직접적 영감을 던진 것은, 이집트 카르나크 신전의 ‘부러진 오벨리스크’였다. 좀더 상세히 추론하면, 1857년께 촬영된 카르나크 유적의 폐허 사진이 그의 상상력을 자극했을 터. 전경에 부러져 바닥에 나뒹군 오벨리스크를, 후경에 훼손됐지만 아직 버티고 선 오벨리스크와 신전의 열주를 담은 이 흑백 사진은, 역사와 문명의 성쇠를 증언하는 아주 드라마틱한 이미지다.
물론 뉴먼의 는 고대의 상징뿐만 아니라 현대의 상징에도 연루된다. 실제 많은 관람객은, 뉴먼의 기념비에서 로버트 밀스가 설계한 ‘미국의 오벨리스크’ 를 연상하고, 조용히 자문하게 된다. ‘민주주의, 자유, 평등, 영광, 재생, 영속 등을 상징하는 미 제국의 오벨리스크도 언젠가 무너져내릴까?’ 뉴먼의 녹슨 기념비를 바라보며, 미국이 로마제국처럼 몰락하고 난 뒤의 세상을 상상하는 일은 부자연스럽지 않다.
뉴먼은 1963년 제작에 착수했으나, 기술적 문제로 1967년에야 완성할 수 있었고, 1969년까지 보강 작업이 계속됐다. 유대계인 작가는 1963년 유대교 성전을 설계하다가 를 발상했다고 전하므로, 이 조각을 ‘우상을 금지하는 유대교 율법에 부합하는 우상’으로 독해해도 무리는 아니다.
는 총 석 점이 제작됐다. 첫 번째 것은 1967년 완성 직후 ‘환경 조각’전에 초대돼 뉴욕 맨해튼의 시그램 빌딩 앞에서 대중에 첫선을 뵀다(시그램 빌딩은 대건축가 미스 반데어로에의 걸작으로, 모더니즘 건축을 대변한다). 따라서 세상은 이를 현대 문명의 성쇠를 상징하는 현대적 기념비로 받아들였다.
이후 수도 워싱턴으로 자리를 옮긴 기념비는, 약 3년간의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71년 휴스턴의 로스코 예배소 앞 거울 연못에 안착됐다. 이 경우, 1969년 작품의 구매자로 나선 메닐 부부(John and Dominique de Menil)가 ‘마틴 루서 킹 목사를 기리는 뜻’을 표방했고 작가가 이에 동의했으므로, 기념비는 미국 흑인민권운동의 상징이 됐다. (본디 ‘흑백평등’이라는 이상의 표징으로 시에 기증할 계획이었지만, 시의회가 거부함으로써 무산됐다.) 하지만 작품 제작 당시 킹 목사는 생존했으므로, 이는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2차적으로 부가된 의미다.
두 번째 것은, 1970년 시애틀 워싱턴대학 캠퍼스의 ‘붉은 광장’에 안착했다. 시애틀의 미술후원재단인 버지니아라이트기금이 구매해 기증한 이 기념비 역시, 미국 민주주의의 이상과 좌절을 표상한다.
세 번째 것은, 1971년 뉴욕 현대미술관에 소장됐다. 미술관의 학예실장 앤 템킨은 이 조각을 “딱히 무언가를 기념하지 않는 기념비 형태”라고 소개하며, “모두를 대변하는 상징을 창안하려 애쓴 뉴먼의 민주적 지각과, 기본적으로 대중적 정치 감각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는 사견을 밝혔다.
이론가들의 촌평을 종합하면, 는 지시하는 대상이 부재한 텅 빈 기표다. 하나 작가가 1970년에 작고했으므로, 적어도 작가의 위업을 기념하는 뜻만은 지울 수 없다.
미술·디자인 평론가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속보] 헌재 “윤석열 통보서 받은 걸로 간주…27일 탄핵심판 개시”
민주 장경태 “김건희, 계엄 당일 성형외과에 3시간 있었다”
[단독] “말 잘 듣는 장교들, 호남 빼고”…‘노상원 사조직’ 9월부터 포섭했다
우원식 “한덕수, ‘내란 특검’ 후보 추천 의무 오늘까지 이행하라”
이승환 “‘정치 언행 않겠다’ 서약 거부, 구미공연 취소 통보 진짜 이유”
노상원 ‘계엄 수첩’에 “북의 공격 유도”… 정치인·판사 “수거 대상”
계엄의 밤, 사라진 이장우 대전시장의 11시간…“집사람과 밤새워”
“내란 직후 임명…자격 없다” 국회 행안위서 바로 쫓겨난 박선영
[단독] 윤석열, 3월 말 “조만간 계엄”…국방장관·국정원장·경호처장에 밝혀
[단독] HID·특전사 출신 여군도 체포조에…선관위 여직원 전담팀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