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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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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걸들의 저녁 식사

신화적·역사적 여성 39명을 기리는 설치미술 주디 시카고의 <디너 파티>…
여성을 수동적 자연에 비유하고 인종적 한계 보인다는 비판도 받아
등록 2011-06-24 16:37 수정 2020-05-03 04:26
미국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에 소장된 주디 시카고의 <디너 파티>((Dinner Party). 도기·자기·섬유의 재질로 만들어졌다.

미국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에 소장된 주디 시카고의 <디너 파티>((Dinner Party). 도기·자기·섬유의 재질로 만들어졌다.

미국 페미니스트 미술운동을 대표하는 (Dinner Party·1974~79)는, 현대미술가 주디 시카고(1939∼)가 제작을 주도한 6년간의 공동 창작물로, 1979년 대중에게 공개된 이래 “3대륙 6개국 16개소를 돌며 10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을 동원했다”는 문제작이다.

신화적·역사적 여성 39명을 기리는 이 의사-종교적 설치미술의 기본 구성은, 한 변의 길이가 14.63m에 이르는 정삼각형 형태의 대형 식탁과, 특별히 제작된 식기와 자수를 놓은 식탁보 등 테이블 장식이다. 이 가운데 단연 관객의 눈길을 끄는 것은, 여성 성기의 모티프를 다양하게 변주하는 식기 모양이다. 역사에서 종종 배제되는 여성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그 공로를 축하하는 기념비로 제시된 이 음문 형상들은, 남근적 기념비의 전통에 화답하는 대안으로 제시됐다.

식탁의 제1면은 선사시대에서 로마제국 시절까지를 다루며, 13명의 여성을 제시한다. (고대문명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태초의 여신, 다산의 여신, 이시타르(메소포타미아의 여신), 칼리(힌두교의 여신), 뱀의 여신, 소피아(지혜의 여신), 여전사 아마존, 해트세프수트(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여신), 유디트(구약성서에 등장하는 구국의 성녀), 사포(고대 그리스의 동성애자 시인), 아스파샤(고대 이집트 여왕), 부디카(켈트 일족인 아이시나이의 여왕), 히파티아(고대 이집트 철학가).

식탁의 제2면은 기독교 태동기부터 종교 개혁기까지를 다루며 역시 13명의 여성을 제시한다. (고대 로마의) 성녀 마르셀라, (중세 초기 아일랜드의) 성녀 브리지다, 테오도라(비잔틴 여왕), 로스비타 수녀(중세 독일 문학가), 트로툴라(중세 중기 살레르노의 명의), 아키텐의 엘레오노르(프랑스왕 루이 7세를 버리고 영국왕 헨리 2세와 결혼한 권력자), 빙겐의 힐데가르트(중세 중기 독일 작곡가), 페트로니야 드 미드(14세기 초 아일랜드에서 화형당한 마녀), 크리스틴 드 피상(중세 후기 프랑스 소설가), 이사벨라 데스테(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 정치·예술 후원가), 엘리자베스 1세(16세기 영국 여왕),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이탈리아 초기 바로크 시기 화가), 안나 판 슈어만(17세기 독일·네덜란드 지식인).

식탁의 제3면은 미국 건국기에서 여성해방운동기까지를 다루며 마찬가지로 13명의 여성을 제시한다. 앤 허치슨(영국 태생의 미국 종교 지도자), 사카야위(루이스와 클라크의 북미 원정을 안내한 원주민 여성), 캐롤라인 허셜(독일 태생의 영국 천문학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영국 여권운동가), 소저너 트루스(아프리카계 미국인 여권운동가), 수전 B. 앤서니(미국의 여성 참정권·노예제도 폐지 운동가), 엘리자베스 블랙웰(미국 최초의 여의사), 에밀리 디킨슨(미국 문학가), 에델 스미스(영국 작곡가·여성 참정권 운동가), 마거릿 생어(피임운동가), 내털리 바니(파리에서 활동한 미국 문학가), 버지니아 울프(영국 문학가), 조지아 오키프(미국 화가).

식탁 너머의 삼각형 바닥엔 백색의 삼각형 타일- 무지갯빛이 감도는 유약을 발라 구운- 을 깔았는데, 거기엔 여성사 인물 999명의 이름이 금빛 유약으로 시문돼 있다. 그런데 살레르노의 아벨라(14세기 이탈리아 의사)에서 조라 닐 허스턴(아프리카계 미국인 민속학자)에 이르는 길고 긴 인명록에서, (내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황인종 여성을 찾기 어렵다는 점은 다소 황당하다.

1980년대 초반 루시 리파드를 비롯해 페미니스트 평론가들은 를 걸작으로 칭송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러나 곧 반론에 부딪혔다. 비판에 나선 페미니스트 논자들은, 기념비로 제시한 음문 형상을 꽃잎이나 나비 등의 모티프로 변주했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여성성을 수동적 자연에 비유함으로써 재차 신비화·타자화하고 말았다”는 것이 요지였다. 여타 힐난의 화살은, “시카고가 작품 제작에 자원한 여성 동지들을 이용해 자신의 명성을 추구했다”는 점을 향했고, “여성을 역사의 패배자로 그린 ‘피해자 예술’(Victim Art)의 전형이다”라는 폄훼로까지 이어졌다.

미술·디자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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