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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추상화가가 아니다”

스스로 추상화가로 여기지 않은 마크 로스코의 <시그램 벽화>… 그가 미국보다 영국을 사랑한 이유
등록 2011-10-07 19:23 수정 2020-05-03 04:26
» 도판. 마크 로스코의 1959년 작 <적갈색에 빨강(시그램 벽화)>(Red on Maroon(Seagram Murals))은 영국 테이트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 도판. 마크 로스코의 1959년 작 <적갈색에 빨강(시그램 벽화)>(Red on Maroon(Seagram Murals))은 영국 테이트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전후 추상미술의 대가로 꼽히는 마크 로스코(1903~70)는 늦깎이에 속한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그는, 오랜 모색기를 거쳐 1947년 40대 중반의 나이에 비로소 실험적 추상화풍을 개척하기 시작했고, 1949~50년에 이르러 자신만의 특징적인 추상화 양식을 구축해내는 데 성공했으며, 1950년대 중반 정점에 이른 뒤 지속적으로 수작을 양산했다.

뒤늦게 맞은 전성기의 추상적 그림들은, 커다란 캔버스를 바탕으로, 확장하거나 진동하는 듯 뵈는 직사각형의 원색면을, 회화적 공간에서 부유하는 창문의 형상으로 병치해놓은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마크 로스코를 ‘색면추상’(Color Field Painting)의 대표작가로 꼽았다.) 말년으로 갈수록 화폭은 점점 어두워지는 경향을 띠었고, 자연 비극적 성격이 강해졌지만, 대중의 뇌리에 남은 그림은 주로 원색적이고 화사한 색채를 담은 작품이다.

고로 로스코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은 주로 1949~50년에 제작된, 다채로운 사각의 색면을 담은 추상화다.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이 소장한 <no.>(1949~50)가 바로 그런 걸작이라 하겠다. 하지만 예술사회학적 의의를 지닌 굉구(宏構)를 꼽자면, (Seagram Murals) 연작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연작은, 뉴욕 시그램 빌딩의 1층에 들어설 최고급 레스토랑 ‘포시즌스’(Four Seasons)의 벽면을 장식할 벽화를 의뢰받은 로스코가, 1958년 가을부터 1959년 초여름까지 제작한 30점의 대형 유화와 일련의 스케치와 수채화를 일컫는다. 레스토랑엔 불과 7점의 작품만이 설치될 수 있었지만, 작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창작에 임했다.
하나 1959년 8월 완성을 앞둔 레스토랑을 방문한 로스코는, 돌연 계약금과 제작비를 모두 환불하고 작품의 인도를 거부해버렸다. 당시 화가는 “그처럼 많은 돈을 내고 그런 종류의 음식을 먹는 사람이라면 내 그림을 결코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라며 성을 냈다고 전한다. 세상 물정에 그다지 밝지 못했던 그는, 예술이 우선시되는 공간을 기대했던 것일까?
많은 이들이 로스코를 위대한 추상화가라고 믿(었)지만, 정작 그의 생각은 달랐다. 1957년 그는 이렇게 토로했다: “나는 추상화가가 아니다. …나는 색채나 형태 등의 관계엔 관심이 없다.” 그는 “과거 구상화 시절의 형상이 그대로 사각의 색면이 됐다”고 이야기하며, 여전히 자신의 그림은 형상적이라고 주장했다.
로스코는 미국의 관객을 혐오한 반면, 영국의 관객을 애중했다. 1961년 영국 화이트채플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때, 순진무구하면서도 점잖은 면모를 지녔던 당시의 영국인들은 매우 원초적으로 반응했다. 갤러리에 들어서면서 어린아이처럼 놀라고, 마주한 화면이 뿜어내는 강렬한 느낌에 감동하며, 장시간에 걸쳐 진중한 자세로 전시를 감상했던 것. 추상미술에 무지한 덕분에 거꾸로 그림의 가치를 잘 포착했다고나 할까. (작가는 영국의 무슬림들이 기도용 카펫을 들고 와 그림 앞에서 기도할 때 몹시 기뻐했다고 한다.)
작품의 설치 환경에 까다로웠던 로스코는 당시 직접 작품의 설치를 감독했고, 화이트채플갤러리는 작가의 의도대로 ‘색면의 공간에 가로막힌 느낌’을 연출하는 데 성공했다. 화가는 자신의 작품을 감상할 때 충분히 가까이에 서서, 즉 대략 365~457cm의 거리를 두고 감상할 것을 권고했다. 조명에도 몹시 신경을 써서, 어두운 환경을 조성하려는 큐레이터들과 달리, 그는 밝은 조명으로 색면화의 연극적 느낌을 강조하길 바랐다.
영국 사회의 환대를 응감한 로스코는, 어느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난 셰익스피어와 디킨스 같은 인물에 동질감을 느껴요. 때로 정말로 그들이 뉴욕에 이민 온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 같다고 생각한답니다.” 이런 호감은 1969년 연작 가운데 9점을 선별해 영국 테이트미술관에 기증하는 일로 이어졌다. (오늘날 테이트미술관의 자랑인 ‘로스코의 방’은 그렇게 실현됐다.)
한데 1970년 2월25일 마침내 기증품이 미술관에 도착하던 날, 작가는 작업실에서 제 목숨을 끊었다. 향년 68살이었다.
*‘임근준의 20·21세기 미술 걸작선’ 연재를 마칩니다. 애독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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