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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서 소리가 울려나온다

작가의 페르소나로 읽히는 소그림 연작 중 백미, 앳된 수소의 흥취 담아 빠르게 완성해낸 이중섭의 <황소>
등록 2011-09-23 11:59 수정 2020-05-03 04:26
서울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된 이중섭의 <황소>. 종이에 유채로 그렸다. 1953~54년작 추정. ⓒ이중섭

서울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된 이중섭의 <황소>. 종이에 유채로 그렸다. 1953~54년작 추정. ⓒ이중섭

‘천재화가’ 이중섭(1916∼56)의 작품을 이야기할 때면 그의 남다른 면모를 증명하는 여러 에피소드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어려서 벽화가 그려진 고구려 고분 안에서 잠을 잤다” “10대 후반에 이미 한글 자모로 된 그림을 그렸다” “일본 회사의 보험금을 타서 학교를 재건하겠다며 교사에 불을 질렀다” “고교 졸업 앨범에 항일적 그림을 그려 사진첩 제작이 취소됐다” “하루 종일 소를 관찰하다가 소도둑으로 몰렸다” “껌을 훔친 소년을 마구 폭행하는 군인을 말리다가 머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친구(마영일)에게 사기를 당하고도 끝내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은지화 석 점이 1955년 일찌감치 미국 뉴욕현대미술관에 소장됐다” “김광림 시인에게 작품을 모조리 불살라달라고 부탁했다” “부산 피란 시절 텅 빈 방에서도 커다란 호박덩이 하나를 그려놓고 ‘얼마나 편안한 자세냐’며 좋아했다” “성인이 돼서도 잠자리에, 심지어 남의 집 이부자리에 종종 오줌을 실례했다” 등등.

일화 가운데 으뜸은 이것이다. “나를 빤히 쳐다보며 자신의 상의를 확 낚아챘다. 단추가 후두둑 떨어지며 가슴이 열렸다.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가 가슴을 헤쳐놓았다. 나도 도로 주저앉으며 단추가 잠긴 옷을 그냥 벗었다./ 이어 이번엔 속옷을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팬티는 상대방 것을 찢어댔다. 무슨 게임이나 하듯이 신바람이 나서 그랬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해괴망측한 벌거숭이 술자리가 벌어졌다. 아랫도리를 그냥 드러낸 채로.” -김광림 시인, ‘나의 이중섭 체험’(1977)에서

만약 이중섭의 대표작을 딱 한 점만 골라야 한다면 무엇을 꼽아야 할까? ‘1999년 1월 미술평론가 50명에게 의뢰’해 모 일간지가 선정한 ‘21세기에 남을 한국의 그림’에선 서울 홍익대학교가 소장한 이중섭의 (1953년 추정)가 1위에 올랐다. 자연스레 가 이중섭 그림 가운데 으뜸이란 소리다. 물론 이에 어깃장을 놓는 사람도 많다. 월남 지식인들 가운데엔 “(남아 전하지 않는) 원산 시대의 그림이 더 낫다”고 잘라 말한 경우도 있었단다. 아무튼 평자들은 이중섭의 소 그림을 일종의 자화상으로 간주했다. 황소가 작가의 페르소나라는 것.

그런데 대중은, 황소의 머리 부분만 클로즈업한 그림을 사랑한다. 더 정감이 가기 때문일 게다. 황소 두상을 담은 그림 가운데 명작은 두 점이 있다. 하나는 김광균 시인이 소장했던 (연도 미상)고, 다른 하나는 한동안 김종학 화백이 소장했다가 삼성미술관 리움의 대표 소장품이 된 (1953∼54년 추정)다. 전자는 조형적으로 더 안정된 모습에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반면 후자는 작가가 흥에 겨워 빠른 속도로 완성해낸 그림이다. 한데 김광균 시인이 소장했던 를 모본으로 삼은 듯 보이는 태작들이 존재하므로, 나는 후자를 백미(白眉)로 꼽는다. 게다가 2005년 ‘이중섭 드로잉’전(삼성미술관 리움)에서 해당 작품의 기초가 된 것으로 짐작되는 연필 드로잉 (1950년대 초반 추정)가 발굴·전시됐으므로 그 가치와 의의가 배가된 면이 있다.

이중섭의 황소 애착에 관해선 재밌는 대화가 전한다. 유치환 시인이 교육자의 근엄함을 잠시 벗어나 음탕하게 웃으며 “이형은 쇠불알을 그리고 싶어 소를 그리지요?” 하고 물었더니, 작가는 이렇게 답했단다. “그럼요, 쇠불알 덕분에 소가 좋지요. 그 주머니에는… 만물 삼라만상이… 다 들어 있쇠다!” 원초적 성기 애호로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쇠불알이 보이지 않는 이 그림은 대표작 자격이 부족하지 않느냐고? 아니다. 혈기 왕성해 보이지만 아직 앳된 티가 나는 황소는, 힘차게 울부짖으려는 듯 입을 벌렸다. 많은 이들이 평하듯, “그림에서 소리가 울려나올 듯하다”. 하지만 굵은 이를 드러내놓고 우는 혹은 웃는 모습은, 전형적인 플레멘 반응(Flehmen Reponse·성적 흥분을 자극하는 페로몬을 감지하려고 윗입술을 말아 올려 콧구멍이 닫히거나 좁아지게 해 서비기관으로 공기를 급격히 빨아들여 후각기관을 자극하는 성적 행위)의 그것이다.

황소를 구경하며 야외에서 연필로 사생(寫生)할 때, 필경 작가는 발정기를 맞은 암컷의 오줌 냄새를 맡고 흥분하는 앳된 수소의 모습에 어떤 흥취를 느꼈을 테다. 이 작품처럼 순진무구한 남성의 매력을 담은 현대미술품은 의외로 드물다.
미술·디자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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