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을 들어서서 복도를 따라 죽 걸어간다. 중간에 있는 계단을 걸어 3층까지 올라간다. 원형으로 된 공간이 내려다보인다. 들고 온 똑딱이 카메라를 꺼낸다. 카메라는 손에 감춰질 정도로 작다. 카메라를 아래로 향하게 하고 아래를 바라본다. MP3를 듣는다. 기다리기 위해서다. 기다린다. 무언가 딱 맞는, 미리 그린 이미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윽고 빛이 내리는 건물 벽 저쪽에서 사람이 한 명 들어선다. 셔터를 누른다. “기다리면 반드시 온다. 나중이냐 금방이냐의 차이긴 하지만. 기다리면 심심한 줄을 모른다. 그 순간이 언제 올지 모르니까.”
‘오늘의 사진’으로 97차례나 뽑혀
박물관에서 안태영(38·정민러브·네이버 블로그 blog.naver.com/73052611)씨가 기다리는 장소는 주로 두 군데다. 로비를 바라볼 수 있는 3층 복도 끝과 원형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여러 가지 옹기종기 생겨나는 이야기가 있다.
빛이 많이 들어오게 설계된 박물관 건물은 안태영씨를 매료시켰다. 빛은 유리 천장을 통해 들어오고 지붕을 한 번 더 통과해서 부드러워진다. 박물관 전체가 천장을 통해 들어온 빛으로 밝지만 은은해서 내부를 밝히는 곳곳의 조명들도 제 역할을 한다. 그가 맨 처음 박물관에 온 것은 사진 찍기를 열심히 하기 전이었다. 그는 벽에 걸린 작은 디지털 시계와 거기 옆으로 내려 비치는 빛이 좋았다.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 그 빛이 떠올랐다. “2년간 100번도 더 왔을 겁니다.” 그의 집은 경기도 안양이다.
안태영씨의 사진은 네이버가 선정하는 ‘오늘의 사진’에 97차례(2011년 1월까지) 뽑혔다. 그의 사진은 여유롭고 구도가 아름답고 위트가 넘친다. 너른 계단을 바쁘게 올라가는 여고생이 있다. 한쪽에 몰려 있어서 더 바쁜 듯 보인다(‘Hurry Up’). 물고기 떼의 움직임에 따라 호수의 물결이 더 크게 물결친다(‘가족 나들이’). 날파리 떼가 나는 곳에 비행기가 나타난다. 날파리 떼는 비행기가 투하한 폭탄처럼 보인다. 제목은 ‘돌진하라’. 넓은 계단에 양쪽으로 두 남자씩 앉아 있다. 가운데로 여자가 남자의 팔짱을 끼고 걸어간다. 제목은 ‘그녀의 선택’. ‘나의 왼손’ 시리즈는 그의 왼손을 사진에 셀프 카메라로 집어넣는다(그래서 손이 아주 커 보이는 왜곡 효과가 나타난다). 왼손은 돈을 받고 택시를 잡는다. 하늘에 건배를 하고 담뱃불을 붙여준다. 옥상을 향해 쭉 뻗었는데 옥상에서 누군가 손을 내밀고 있다. 안 보이는 오른손은 카메라를 잡고 사진을 찍고 있을 터다. 그 오른손이 잡은 카메라는, 놀랍게도 ‘똑딱이’다.
대충 물체가 화면에 가득 차면 셔터를 누르는 것이 똑딱이의 역할이다. ‘일상을 포착한다’는 것에 맞게 생일 잔치를 찍고, 모인 사람들에게 ‘치즈’를 안기며 단체 사진을 찍고, 먹은 음식을 찍고, 음식을 먹는 친구를 찍고, 맛있어하는 친구를 연출해 찍는다. 하지만 안태영씨는 빛을 그림자와 대비시키고 움직임을 포착하고 구도를 그리고 여백을 만든다. 프로 사진가들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정선된 감동 그대로다. 안씨는 똑딱이만으로 사진을 찍는다. 못할 게 없고, 사실은 더 좋다고 생각한다.
원형 로비를 내려다보고 카메라를 대기해놓고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DSLR든 똑딱이든 기다리는 것은 똑같다. 하지만 똑딱이가 기다리기 더 쉽다.” 디지털일안반사식(DSLR) 카메라는 뷰파인더에 눈을 대고 봐야 하지만 똑딱이는 액정표시장치(LCD) 화면으로 보면 된다. 카메라를 원하는 장면에 대고 화면으로 보면서 노출을 맞춘다. 그는 주로 P모드(프로그램 모드, 자동으로 모드를 설정하되 노출·포커스 등을 사용자가 설정할 수 있는 모드)로 찍는다. 화면으로 보면서 맞추기 때문에 실패가 거의 없다.
어쨌든 그도 DSLR로 찍던 시절이 있었다. 사업 실패로 의기소침해 있던 어느 날 친구가 들고 온 DSLR를 보고는 “세상에 이런 일이” 하며 놀랐다. 취미로 틈틈이 사진을 찍기는 했는데, 친구의 카메라에 놀랐던 것은 ‘필름이 필요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2007년의 일이니 디지털카메라가 세상을 휩쓸고 있던 때였다. 카메라만 사면 더 이상 돈 들 일 없이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그는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DSLR를 한 대 샀다. “잘 나오더라고요.” 하지만 그는 DSLR를 버렸다. 계기가 된 사건은 이렇다.
사진 찍는 것에 열중하면서 동호회 활동도 시작했고, 동호회에서 개최한 출사도 나갔다. 얼마 전에 구입한 일명 똑딱이 디지털카메라를 들고서였다. 출사 전 모인 장소에서 어떤 사람이 그의 카메라를 만져보더니 “이런 카메라는 줘도 못 찍겠다”며 카메라를 툭 던졌다. 카메라가 받은 대접에 “내가 땅바닥에 내쳐진 느낌”이 들었다. 그는 그 말을 한 사람의 양해를 구해 그의 카메라를 살펴보았다. 최고급 사양의 카메라였다. LCD에는 그동안 찍은 화면이 펼쳐졌다. 그는 점심 때 김치찌개를 먹었나 보다. 몇 장의 점심 때 먹은 음식 사진이 있었다. 뒤로는 그 전날, 그 전전날 먹은 음식 사진들만 즐비했다. 이런 좋은 카메라를 들고 고작 찍는 것이 ‘삼시 세끼 인증샷’이라니.
똑딱이 포토그래퍼의 서러움오기가 생겼다. 똑딱이도 잘 찍힌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DSLR와 똑딱이, 두 카메라를 비교해보자 화질의 차이가 눈에 띄었다. 그는 그즈음 태어난 아이를 주로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더라도 “이때는 요런 모습이었지” 하지 “화질이 왜 이래”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마음을 정했다. DSLR를 버렸다.
똑딱이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사진가로서의 서러움도 시작됐다. 피사체에 사진기가 몰려 있는 경우 똑딱이를 들고 가면 큰 카메라를 든 사람에게서 “아저씨, 거기 좀 나와주세요”라는 말을 듣었다(, 한빛미디어 펴냄). 그가 이전에 했던 사업은 외국 화장품 수입이었다. “화장품 수입할 때도 그랬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양을 많이 따지더라고요.”
작은 원형 로비를 찍은 뒤 커피숍으로 이동해서 앉는다. 거기서 내려다보이는 곳은 오후 4시가 되면 블라인드가 내려오고 원형 현관 로비에 뜨문뜨문 빛이 내리쪼Red인다. 그 순간에 안씨가 ‘빛의 철길’이라 부르는 길이 만들어진다. 3층에서 이 현관 로비를 내려다보며 사진을 많이 찍었다. 빛의 철길을 천진스럽게 지나가는 아이와 기쁜 듯이 지나가는 아이, 그 길을 따라가듯이 걸어가는 남자가 화면에 담겼다. 빛나는 걸작 사진들이다. 그 뒤 로비에는 안내 데스크가 생기면서 철길이 끊겼다. “아쉽기도 했지만 이제 그런 사진은 나한테만 남았구나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커피숍 맞은쪽에는 양복 입은 남자가 앉아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얼굴에는 초조함이 묻어난다. 커피를 마시러 온 것도 책을 읽으러 온 것도 아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현관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남자가 갑자기 일어난다. 곧 기다리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안 남자는 다시 자리에 앉는다. 아까 그 자세 그대로다. 안태영씨는 남자가 일어난 순간 셔터를 누른다. 사진에는 정적 뒤 일어난 커다란 움직임이 그대로 담겼다. 그 순간의 희열이 ‘휙’ 지나간 찰나에 있다.
“그 순간은 다시 못 찍으니까요.” 똑딱이는 그 순간을 기다리는 데 좋다. DSLR 같은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앉아 있었다면 남자는 경계했을 것이다. DSLR를 가지고 있었다면 빛과 남자의 조화로운 구도를 갑자기 맞춰 찍기 힘들었을 것이다.
누구나 DSLR로 사진을 찍는 시대다. 무거워서 꺼리던 여자들에게도 어필하기 시작했다. “무겁다 무겁지 않다”는 광고도 나왔다. 하지만 안씨는 콤팩트 디지털카메라만으로 사진을 찍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그것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순간의 희열을 찰나에 담다안씨는 말한다. “아직도 나는 내가 찍은 사진들을 보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 있다. 어쩌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똑딱이조차 나에게는 과분한 카메라가 아닐까 하는….”(앞의 책)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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