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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한 발, 급할수록 돌아가라

[액션 읽는 여자] 상처와 무기력 딛고 완성한 히어로의 성장, 영화 ‘슈퍼걸’
등록 2026-07-02 21:15 수정 2026-07-08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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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이후 42년 만에 돌아온 2026년판 ‘슈퍼걸’은 삶의 선택지가 늘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구조적 차별이 해소되지 않은 사회에 살고 있는 젠지세대 여성의 초상이다. 네이버 영화

1984년 이후 42년 만에 돌아온 2026년판 ‘슈퍼걸’은 삶의 선택지가 늘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구조적 차별이 해소되지 않은 사회에 살고 있는 젠지세대 여성의 초상이다. 네이버 영화


 

“난 좀 누울게….”

영화 ‘슈퍼걸’의 주인공 카라 조엘이 첫 액션 시퀀스를 마무리하고 한 말이다. 강력한 초능력을 보유한 크립톤인(DC 코믹스 내 가상의 종족)이자 방금 적을 물리친 슈퍼 히로인의 입에서 나온, 이토록 맥 빠지는 대사라니.

첫 등장부터 슈퍼걸의 상태는 심상치 않다. 겨우 스물셋, 한창나이에 몸과 영혼이 술에 절어 우주를 떠돌고 우주선 안은 청소를 포기한 원룸처럼 지저분한데다 진지하게 교감하는 대상은 반려견 크립토뿐이다. 영화의 메인 카피마저 ‘진실, 정의, 그러든가’다.

그런 카라 앞에 루시가 나타난다. 루시는 가족을 몰살한 원수 크렘에게 복수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간청하지만 카라는 거절한다. 그러나 크렘의 독화살에 맞은 크립토를 살리기 위해 해독제를 찾으러 나서면서 카라는 루시, 현상금 사냥꾼 로보, 그리고 외면했던 과거의 상처까지 마주한다.

 

무기력했던 이유

 

슈퍼걸이 이처럼 무기력한 데는 크립톤의 멸망과 가족의 죽음에 원인이 있다. 카라가 태어나기 전부터 붕괴하기 시작한 크립톤은 행성의 극히 일부만 보존되고 카라는 위태로운 환경에서 성장한다. 그러던 중 엄마마저 중병에 걸려 사망한다. 과학자인 아버지는 슬픔에 빠진 딸을 살리기 위해 딸을 크립토와 함께 사촌 오빠인 슈퍼맨 클라크가 있는 지구로 보낸다.

같은 종족이며 비슷한 능력을 가졌지만 지구에서 슈퍼걸과 슈퍼맨, 두 사람의 운명은 극명하게 갈린다. 클라크는 태어나자마자 지구로 보내져 지구인 양부모에게서 자랐고 고향 별에 남은 사람들의 슬픔을 알지 못한다. 더욱이 양부모는 클라크를 극진한 사랑으로 키웠다. 그는 정의를 구현하며 지구인들에게 사랑받는 히어로로 살아간다.

반면 카라는 태어날 때부터 절망에 빠진 부모의 희망이었다. 그는 부모와 함께 슬픔을 견디며 아이가 맡기엔 무거운 역할을 수행했다. 그런데도 부모를 구하지 못했고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은 깊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한마디로 클라크는 슬픔으로부터 즉각 분리돼 보호받은 아들이고, 카라는 어른들을 위로하며 슬픔과 함께 자란 딸이다.

과거의 기억을 떨쳐내지 못한 카라는 지구에서도 적응하지 못한 채 슈퍼걸 슈트를 아무렇게나 처박아둔다. “클라크는 슈퍼맨인데 언니는 왜 슈퍼걸이냐?”는 루시의 질문처럼, 카라의 삶은 히로인으로서 가질 법한 자긍심과 인정과는 거리가 멀다. 성별은 히로인의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랬던 카라가 조금씩 변한다. 크립토마저 잃고 루시가 복수에 눈이 멀어 자신의 트라우마를 반복할까봐 두렵다. 그렇다고 루시를 구하자니 너무나 무기력하다. 하지만 루시는 루시대로 카라가 어떤 사람인지를 반복해서 일깨우고 결국 카라가 루시에게 했던 말, “네가 누구인지 보여줘”가 부메랑처럼 카라에게 돌아온다. 그는 다시 슈퍼걸 슈트를 입고 잃어버렸던 힘을 되찾는다. 오래된 슬픔과 자괴감을 넘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슈트로 되찾은 정체성

 

슈퍼걸의 정체성을 찾은 뒤에 카라의 액션도 진일보한다. 카라는 중반부까지 평이한 액션을 선보이다가 후반부에서 방향과 속도가 더해진다. 전매특허인 양팔을 쭉 뻗은 자세로 하늘을 날면서 슈퍼걸의 위력은 극대화된다. 누워만 있던 그의 몸이 중력을 거스르고 수직 상승할 때, 두 눈에서 붉은색 초강력 레이저가 발사될 때, 관객은 우리가 알던 슈퍼걸의 모습에서 쾌감을 느낀다.

왜 지금 무기력한 슈퍼걸이 등장했을까? 히어로 무비의 주인공들은 새로운 세대의 감수성을 대변하며 끊임없이 재창조된다. 그렇게 보면 2026년에 돌아온 슈퍼걸은 젠지세대 여성의 초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 ‘슈퍼걸’은 1984년, 페미니즘의 물결이 거셌던 시기에 개봉했다. 이 영화에서 카라는 지구에 정착하고자 평범한 대학생으로 위장하고 사람들을 주술로 조종하는 마녀와 싸운다. 그로부터 42년이 흘렀다. 그사이 2015년 전후로 페미니즘 리부트가 있었다. 슈퍼걸이 대변하는 여성들은 직간접적인 페미니즘의 영향 아래 성장한 세대라고 봐야 한다.

새로운 슈퍼걸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떠돌이, 혹은 주변인이다. 붉은 태양, 노란 태양, 녹색 태양을 떠도는 슈퍼걸은 어딘가에 있을 내 자리를 찾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어디에도 발을 붙이지 못하고 자학까지 일삼는다. 우울한 생일을 맞아 그는 일부러 초능력을 떨어뜨리는 붉은 태양 행성에 머무는데, 굳이 그곳에서 생일을 보내는 이유는 다른 곳보다 고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서다.

슈퍼걸은 더 이상 여성도 슈퍼맨처럼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상징이 아니다. 역사상 가장 많이 교육받은 여성들, 겉보기엔 삶의 선택지가 늘어난 것 같지만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차별이 해소되지 않은 사회에서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들은 이전 세대의 삶을 그대로 이어받을 수 없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개척하자니 본보기가 없다. 가능성은 충분하다 못해 넘치지만, 그 가능성이 손에 잡히는 기회로 이어지지 않는다.

 

연대와 성장의 서사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던가. 결국 슈퍼걸 카라에게 필요한 것은 그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그러나 그가 술에 취해 냉소했던 정의다. 또 루시에게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진실이 간절했다. 험난한 세상에서 내가 누구인지 알기란 쉽지 않다. 그럴수록 우리는 자신에게 돌아가야 한다. 카라와 루시, 어렵게 정체성을 찾은 여성들이 앞으로 어떤 활약을 보여줄지 기대된다.

 

양민영 주짓떼라·‘운동하는 여자’ 저자

 

*액션 읽는 여자: 여성 주연 영화를 보며 여성의 시선으로 ‘싸우는 몸’을 발견하는 시간. 여성의 몸을 향한 협소한 시선을 확장하는 칼럼. 4주마다 연재.

 

영화 ‘슈퍼걸’에서 카라 조엘의 동반자로 나오는 루시(왼쪽). 네이버 영화

영화 ‘슈퍼걸’에서 카라 조엘의 동반자로 나오는 루시(왼쪽). 네이버 영화


자기방어 팁- 때론 얕은 속임수 활용을!

 

루시가 크렘의 감옥에 갇혔다가 탈출하는 장면에서 그는 어린 나이와 무력해 보이는 인상을 역으로 이용한다. 자신을 풀어주기만 하면 카라에 대해 아는 것을 전부 실토하겠다고 애원하고 방심한 간수는 루시의 손에 묶인 쇠사슬을 풀어준다. 간수를 유인한 루시는 그의 등에 올라타 쇠사슬로 목을 조르고 기절시킨 뒤 감옥에서 탈출한다.

얕은 속임수가 무슨 자기방어인가 싶겠지만 상황에 따라 가해자의 우월감과 방심을 적절하게 이용하는 것도 유용한 전략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영화에서처럼 상대를 제압하는 게 아니라 가해자와 거리를 벌리고 안전한 곳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게 시간을 버는 것이다.

한겨레 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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