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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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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남성성을 만들었다”

시대와 전쟁 양상의 변화가 남성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는

리오 브로디의 <기사도에서 테러리즘까지>
등록 2010-12-15 15:00 수정 2020-05-03 04:26

남자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당신은 무어라 답할 것인가?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을 가르는 문화적 이분법이 흐려지는 이때, 남성성·여성성을 명확히 규정할 만한 문장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더불어 행여 ‘마초’ 취급은 받지 않을까, 무의식에 잠긴 단어들도 무심코 꺼내들기 힘들 터. 그런데 이 시점에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의 석좌교수 리오 브로디는 ‘남성성이란 무엇인가’란 주제를 꺼내들었다. 그것도 7년여의 연구에 걸쳐, 무려 900여 쪽 분량의 책에 그 결론을 실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각기 다른 남성성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영국 군인들. 대형 전쟁은 파괴적인 남성성의 발현으로 이어졌다.삼인 제공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영국 군인들. 대형 전쟁은 파괴적인 남성성의 발현으로 이어졌다.삼인 제공

(삼인 펴냄)에서 브로디 교수는 현재를 “남성성의 전통적인 의미가 침식되어가는 시대”라고 정의한다. 이유는 이미 여러 학자가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해왔다. 직장에서 남성 노동의 중요성이 약화됐기 때문일 수도 있고, 여성권의 신장과 남성의 여성화를 들 수도 있다. 첨단 기술의 영향과 대량생산, 냉전의 종식이 더 이상 남성을 남성답게 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일각의 의견도 있다.

그러면 여기서 남성성, 남성다움이란 무엇일까? 한 문장으로 정의하기는 어렵겠지만 그 뜻을 가늠하지 못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애매모호한 단어들이 머릿속을 맴도는 가운데 어쩌면 가장 정확한 설명을 집어내자면, ‘여성성의 반대’일지도 모른다. 브로디 교수가 예로 든 그리스·로마 신화의 한 토막을 보자.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는 불과 대장장이의 신인 절름발이 헤파이스토스와 결혼한다. 아프로디테는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짐작할 만한 이유로’ 전쟁의 신인 아레스와 바람을 피운다. 그러던 어느 날 이들을 의심하던 헤파이스토스가 교묘하게 만든 사슬 그물로 덫을 만들어 침대 위에 놓고 그들을 꼼짝 못하게 붙든다. 둘은 출판신들의 비웃음을 산다.

여기서 브로디 교수가 주목하는 부분은 아프로디테의 배신이 부상당한 창조자를 제쳐두고 강력한 전사 남성을 택한 것이다. 아레스와 아프로디테는 로마식으로 마르스와 비너스라 불리며 서구 사회에서 아담과 이브 격으로 남성과 여성의 원형을 상징한다. 헤파이스토스는 아레스를 압도할 수 있는 창과 방패를 만드는 기술을 가졌음에도 남성성을 대표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브로디 교수는 남성성을 여성이라는 반대 성 혹은 ‘기술의 조작’ 같은 섬세함에 맞서 상대적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신들의 시대를 지나 고대·중세·근대와 현대를 차근차근 훑어간다. 시대가 바뀔 때마다 남성성의 정의는 달라진다. 그러나 정의의 중심에는 싸움과 상처를 동반한 통과의례와 전쟁이 공통적으로 관통한다. 브로디 교수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남성성도 그 성질을 달리해왔지만 변화의 핵심 원인은 ‘전쟁’이었다고 정리한다.

<기사도에서 테러리즘까지>

<기사도에서 테러리즘까지>

고대에는 남성이 되기 위한 필수적 통과의례로 전쟁을 간주했다. 고대의 남성들은 전쟁의 시련을 딛고 일어나야만 진정한 ‘전사’가 되고 여성과 야만에 대비된, 질서와 문명의 존재인 남성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믿었다.

중세에는 민족 간의 대립으로 전쟁이 왕성해진다. 이에 따라 남성성은 민족 전체를 상정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그러나 여성과 야만에 대비하고 질서의 존재로서 자신을 규정하는 남성성은 여전하다. “중세 후반에는 전쟁으로 인해 민족적 차이에 대한 관념이 급격히 대두되어, 영국인들로 말하자면 ‘우리는 계집애 같은 프랑스인들이나 짐승 같은 아일랜드인, 스코틀랜드인들과 다르다’는 식으로 자신을 정의한다.”

근대에는 기술 발달과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전쟁의 양상과 함께 남성성도 변화를 겪는다. 철도, 장갑 증기선, 기관총, 정밀해진 무기들이 발명된다. 신종 무기의 등장으로 전쟁의 그림자가 곳곳에 드리워지더니 종국에는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질서에 기반을 뒀던 기존의 남성성 역시 점차로, 들썩이는 세계처럼 파괴적이고 비인격적인 지배력으로 정의된다.

현대에 들어선 이제껏 세계를 지배해오던 서구 주류 사회에 대한 반발과 의구심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브로디 교수는 불행하게도 이런 문제의식이 테러리즘의 발발이라는 비극을 낳고 말았다고, 거칠게 정의한다. 2001년 9월11일 알카에다의 미국 뉴욕 테러 공격은 테러리즘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보여줬다. 이전의 남성성은 통과의례를 거쳐야 하는 전사, 질서, 민족주의에 기반을 뒀다. 과거의 남성이 남성성을 획득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목표물을 향해 정확히 돌진하거나 영토·자원을 획득해야 했다면, 현대의 남성성은 당장 손에 잡히지 않는 정치적 목표, 즉 종교·인종 문제와 연결된다.

질서·명예 중시하는 남성성은 어디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브로디 교수가 말한 전통적 남성성의 의미란 무엇일까? 우선, 고정불변의 순수한 남성성 같은 것은 없다. 그러나 전쟁 양상의 변화에 따라 그 성격을 달리해왔어도 질서를 사랑하고 이를 통해 명예를 중시하는 진정한 남성성은 있었다고 브로디 교수는 말한다. 비록 현대의 비인간적이고 파괴적인 전쟁은 그런 남성성을 관통하는 ‘질서’의 의미를 마구 헝클어뜨렸지만 말이다. 이 와중에 패권 국가들은 여전히 ‘악의 축’ 등 호전적인 수사학을 구사하면서 세계의 질서를 자신이 바로 잡겠다고 호언한다. 대량학살무기와 질서를 소중히 여기는 전사의 정신은 과연 어울리는 걸까? 그 불순한 역설이 의뭉스럽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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