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을 속삭여줄게>
정혜윤 지음, 2009년 9월20일 푸른숲 펴냄, 1만2천원
이 책은 이상한 ‘여행 가이드’다. 언젠가 런던으로 떠날 사람이라는 ‘타깃 독자’가 명확하지만 그곳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할 것인가는 모호하다. 일정은 분명 여행객의 코스지만, ‘관광지’라도 자신이 직접 가지 않았다면 언급도 되지 않는다. 화려한 컬러 사진 대신 심심한 똑딱이 사진이 흑백으로 실렸다. 그리고 눈을 휘둥그레하고 두리번거리는 대신 벤치에, 성당 앞에, 호숫가에 가만히 앉아 있다. 런던에 있는 저자의 옆구리에는 런던에 관한 책들이 있다. 런던에서 언제나 딴 런던으로 떠날 준비를 한다. “도쿄와 뉴욕이라고 해도 상관없을지 모른다. 나는 도시의 이름을 빌려 갈망과 호기심과 또 다른 세계와 또 다른 삶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도시든 그 도시의 풍경은 자신의 시선과 감정 속에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떠난다는 말은 단지 목적지만을 지칭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떠난다는 말은 목적지인 런던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저자가 런던에서 런던으로 떠나는 이야기, 요약하면 이렇다. 그 여행은 이런 식이다.
웨스터민스터 사원 앞, 저자는 아줌마들의 남편 험담을 귀담아듣는다. 그리고 첨탑을 보며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떠올린다. 소설에서 맹인은 책 읽어주는 여자의 집을 방문해 성당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달라고 하고, 여자의 남편은 맹인의 손을 잡고 대성당을 그린다.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간간이 드는 빛은 정복왕 윌리엄의 대관식 장면이 되고, 웨스터민스터 사원의 무덤을 스쳐지나가며 대관식과 장례식 사이의 삶이 가장 극적일 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떠올린다.
런던은 또 다른 런던을 부르고, 책은 책을 부르고, 소설은 역사를 부르는 그 비현실적 떠남은 묘하게 현실적이다. 가령 세인트폴 대성당의 속삭임의 회랑. 저자는 단체 입장 시간을 기다려 갤러리에 올라가보라고 권한다. 259개 계단을 올라가면 아래쪽의 아주 조그만 소리도 위쪽까지 들린다고 한다. 갑자기 나는 회랑에 올라 있는 듯, 세인트폴 성당을 헤매며 저자가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이 웅웅거리며 공명하는 것을 들었다. 웅웅웅. 저자가 과거에 있었던 런던은, 독서의 순간 갑자기 현실이 된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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