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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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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아르 한국’을 소독하다

빈속에 ‘텐텐 폭탄주’ 돌리며 탁한 세상 씻어내던 특수부 검사 심재륜
등록 2009-11-18 15:11 수정 2020-05-03 04:25
심재륜. 일러스트레이션 임범

심재륜. 일러스트레이션 임범

같은 폭탄주라도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술자리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나는 ‘5부, 4부 폭탄주’(맥주잔에 맥주 50%, 양주잔에 양주 40%를 따라 섞는 것)를 좋아한다. 그걸 여럿이 돌려 마시면 적당한 취기가 오래 유지돼, 대화도 많이 나누게 된다. 술맛도 좋다. 그 반대편에 ‘텐텐 폭탄주’(맥주잔에 맥주 가득, 양주잔에 양주 가득 따라 섞는 것)가 있다. 이건 맛이고 뭐고 없다. 단숨에 들이켜는 수밖에 없다. 대화? 있건 없건 상관없다. 한 잔 들어간 뒤부턴 술이 술을 먹는다. 주량이 적으면 토하거나 뻗거나 둘 중 하나다.

‘텐텐 폭탄주’를 열 잔 이상 마실 각오 없이는 만나지 못할 사람이 있다. 심재륜(65) 변호사다. 특수부 검사, 특수부장, 강력부장, 중수부장을 거쳐 고검장으로 퇴임하기까지 수사 검사로 대한민국 검사 중 신문에 이름이 가장 많이 오른 이다. 그와 함께 술자리에 앉으면 안주 나오길 기다릴 틈이 없다. 빈속에 텐텐 폭탄이 들어가면 이내 폭발한다. 아무리 술꾼이라도 그 취기를 버티려면 긴장해야 한다. 술 마시면서 긴장하고 싶나? 묘한 건, 그와 함께 마실 땐 자연스레 긴장감이 생기고 그게 즐길 만해진다는 거다.

나는 1989년부터 97년 사이에 만 7년 동안 검찰 출입 기자를 했다. 검찰에 유달리 사건이 많았고, 그 수사의 한가운데에 심재륜이 있었다. 한국 사회가 어떻게 굴러왔고 또 굴러가고 있는지 그 실상을 막 보고 배우기 시작하던 20대 후반~30대 초반의 나는 그에게서 많은 걸 배웠다. 권력층·재벌·조폭 사이의 범죄의 그물망을 오래도록 보아온 그가 들려준 일화들은 블랙코미디가 섞인 ‘한국형 누아르’ 영화 같았다. 이런 것들이다.

군사정권 시절, 정권에 밉보인 한 재벌을 죽이라는 명령이 하달되자 경찰은 그 재벌이 뿌린 뇌물을 뒤졌다. 거기에 고관대작들이 줄줄이 나오자, 청와대에서 경제 사건으로 바꾸라고 검찰 특수부에 지시했다. 특수부는 경제 사건으로 그 재벌을 ‘보냈다’. 그 뒤 저간의 사정을 모르던 후임 특수부 팀이 기록에 들어 있던 뇌물 사건을 다시 꺼내 수사하려다가 혼쭐이 났단다. …대통령의 일본 방문을 앞두고, 총련계 재일동포의 시위를 막기 위해 한 인사가 일본에 밀사로 갔다. 야쿠자를 만나 시위를 막아달라는 부탁을 하고 왔는데 내막을 모르는 경찰이, 한국 조폭이 일본 야쿠자와 자매결연을 맺었다며 그를 잡아넣었단다….

나야 듣고 재밌어했지만, 수십 년간 그런 세상을 수사해온 그는 어땠을까? 그에겐 한국 사회에 대한 냉소와 호기심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태도가 공존하는 듯했다. 그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그 실체에 대해 기자들과 추리를 나누길 즐겼다. 그건 한국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어떤 사람들이 어떤 동기로 거기에 끼어드는지를 유추하는 지적인 작업이기도 했다. 그를 오래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그가 매일같이 마시던 ‘텐텐 폭탄주’는, 누아르 영화 같은 세상을 대하며 생긴 염세성을 씻어내는 소독용 알코올이 아니었을까.

그가 함께 술 마시는 건 기자들 아니면 후배 검사들이다. 정치인이나 선배 검사와 어울리는 걸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한 후배 검사의 말이 기억난다. “심재륜을 존경하지만 심재륜 사단이 되고 싶진 않다. (심재륜보다 선배인) 검찰 고위 간부들과 어울리지 않으니, 그 밑에 줄 서봤자 득이 안 된다.” 실제로 심재륜, 그 자신부터가 위에 잘 보이지 못했다. 김영삼 정부 말기에, 경력상 당연히 대검 중수부장이 됐어야 하는데 한직에 갔다. 김현철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더뎌 여론의 비난이 쏟아지자 검찰은 구원투수로 그를 데려왔다.

그렇게 중수부장이 돼 김현철을 구속했는데, 김대중 정부에선 그가 변호사의 향응을 받았다며 검찰에서 쫓아냈다. 멸치 안주로 폭탄주 마시는 그가 향응을 얼마나 받았을까 싶었는데, 아닌 게 아니라 그는 법원에서 면직 처분이 부당하다는 판결을 받고 복직함으로써 명예를 회복했다. 그러곤 스스로 검찰을 떠났다. 얼마 전에 봤더니 그는 축구 광팬이 돼 있었다. 축구계 내부의 역관계와 문제점을 그 특유의 상상력으로 분석하는 모습이 여전히 그다웠다.

을 보면, 범죄자를 쫓는 수사관이 범죄자와 닮아가는 데 대한 두려움의 묘사가 실감난다. 범죄자들을 수사하려면 그들의 머리로 생각해야 할 텐데, 검사도 비슷하지 않을까. 심재륜이야말로 누아르의 세계를 살았는데, 정작 그를 보면 누아르 영화와 딴판이다. 지금도 웃는 얼굴이 천진하고, 농담할 때 표정이 호기심 많은 개구쟁이 같다. 듣자니 퇴임 뒤 후배들이 그에게 국회로 나가라고 권유했고, 한때 법무부 장관 제의도 있었는데 고사했던 모양이다. 어쩌면 정작 누아르의 세계는 범죄를 수사하는 검사의 세계가 아니라, 그가 발 담그기를 거부한 정치의 세계가 아닐까.

임범 애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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