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덕건 <이머징 인베스터> 편집장. 일러스트레이션 임범
‘386세대’라는 말이 처음 나온 1990년대 초엔 이 말이 그렇게 싫었다.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에 대학 가서, 90년대 당시에 30대이던 세대를 가리킨답시고 컴퓨터 사양을 가리키는 ‘386’을 갖다 붙인 것이었다. 그 조잡한 조어법도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보다 ‘386세대’라는 말은 은연중에 그들이 80년대 민주화운동과 6·29를 이끌어냈다는 자부심을 담고 있었다. 이게 싫었다. 그 세대 안에 별의별 인간이 다 있을 텐데, 또 그때 열심히 운동한 이들은 얼마 되지도 않을 텐데, 두루뭉술하게 섞어버림으로써 현재의 쟁점과 전선을 흐리게 하는 그 교활한 효과, 혹은 의도가 역겨웠다.
언제부턴가 그런 생각도 사라져서 나도 ‘386세대’라는 말을 쓴다. 1962년생, 81학번인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 세대에 속한다. 그럼에도 난 그 세대가 싫다. 어릴 때 운동 조금 했다고, 혹은 하지도 않아놓고, 겸손할 줄 모르고 아무 데나 나서고, 선배 세대의 나쁜 버릇은 그대로 배워서 공사 구별 안 하고 패거리 지어 다니고…. 무엇보다 선배 세대들은 후배에게 부끄러워할 줄 알았는데, 이 세대는 그보다 나은 것도 없으면서 밑의 세대에게 큰소리치며 군림한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럴 거다. 한국 현대사에서 이른바 ‘386세대’ 다음 세대가 가장 불쌍한 세대일 거다.
이번 ‘술꾼’은 내가 아는 내 또래 중에서 가장 ‘386세대’스럽지 않은 이다. 박덕건, 나랑 대학 동기다. ‘ㅡ’와 ‘ㅓ’를 구별 못하는 부산 출신이, ‘ㅓ’가 두 개나 들어가는 이름을 가졌으니 그에게 날아오는 편지의 수신인 이름은 네 가지다. 박덕건, 박덕근, 박득건, 박득근. 이 친구가 초등학교에서 훈민정음을 배울 때 같은 반 친구에게 그랬단다. “훈민정음이 참 훌륭한데 하나가 문제다. (‘ㅡ’와 ‘ㅓ’를 두고) 같은 게 두 개 있다.” 어릴 때부터 한글을 걱정한 만큼 대학에서도 ‘문학연구회’라는 동아리에 있었다. 물론 문학연구보다 데모을 했지만, 그래도 그는 글을 잘 썼다. 운동권이 주도하는 축제의 제문을 죄다 썼다. 4학년 때 서울대 총학생회가 부활할 때, 학생회장 후보로 나선 두 경쟁자의 연설문을 모두 그가 써줬다.
하지만 무슨 일에 앞장서는 건 그의 체질과 거리가 멀다. 배후에서 활약하는 음모가 스타일도 아니다. 학생운동을 했고, 졸업하고 군대 갈 때까지 공장에 위장 취업을 했음에도 그는 느긋함과 한량스러움이 몸에 배어 있었다. 5공 때인 1984년 가을, 대학 4학년일 때다. 이런저런 걱정이 많을 시기인데, 그는 졸업 전까지 할 일 세 개를 정했다. 당구, 바둑, 기타. 학생회 사무실에서 바둑을 두고 기타를 치고…. 운동권 후배들의 눈초리가 곱지 않았는데, 그는 태연하게 벽에 낙서를 했다. ‘마지막 가는 이 가을을 저질러버리자!’ 그 무렵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경찰이 학생회관을 수색했다. 그 장면이 텔레비전 뉴스에 나오면서 그가 쓴 ‘…저질러버리자!’는 글씨를 길게 비추었다. 내 눈에도 과격하게 보였다. 그 ‘저질러버리자’는 게 당구·바둑·기타였음을 알 길이 없던 시청자에겐 더했을 거다.
그는 제대하고 에 들어갔다. 중앙일보사의 몇몇 부서를 돌다가 그만두고 2002년 창간한 남성잡지 의 편집장을 지냈다. 주량이 많진 않지만, 그는 술자리에서 좀처럼 먼저 일어서지 않는다. 대학 때 친하던 6~7명이 1990년대 초에 꽤 자주 모여 술을 마셨다. 2차·3차에 가선 ‘집에 가자’는 이들과, ‘더 마시자’는 이들로 갈렸다. 그는 ‘이즈 맨 이즈, 고 맨 고’(있을 사람 있고 갈 사람 가자)를 외쳤다. 그와 나는 항상 ‘이즈 맨’이었다. 그때 ‘고 맨’들은 이후로 잘나갔다. 텔레비전 시사토론 진행자, 대학교수, 인터넷 언론사 부사장…. 반면 ‘이즈 맨’이던 그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격월간지 편집장, 또 한 친구는 사실상 망한 지 오래인 애니메이션 회사 사장, 나는 반백수….
어쨌거나 그는 지금도 그대로다. 책 읽기를 좋아하되, 이재나 명성에 대한 욕심이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조금 꺼벙해 보이고, 그럼에도 표 나지 않게 원칙을 지킨다. 언론사에서 정리해고 바람이 불자 나가라고 하지 않는데도 먼저 그만뒀고, 잡지 편집장을 하면서 매출이 부진할 때 후배들 월급을 먼저 주고 자기 건 맨 나중에 챙겼다. 1년쯤 전 이런 말을 했다. 세계적인 불황으로 오늘 1만원이 내일 얼마가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각종 매체에서 대학 진학 가이드를 실을 때였다. “나는 내 아이들의 시대가 어떤 시대일지 정말 모르겠어.” 그래서 자식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런 게 정직한 것 아닌가. 그런 태도로 책 읽으며 세상을 탐구하는 게 성실한 것 아닌가. 그가 ‘386세대’스럽지 않은 이유다.
임범 애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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