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지 않은 자여! 여기서 술 마시지 마라!”
그 여자가 쓰는 형용사는 두 개다. ‘옳다’와 ‘옳지 않다’. 처음엔 안 그랬다. 가끔 사람에 대해 “쟤 옳지?” “너 옳지 않아!”라고 말하는 정도였다. 슬며시 두 단어의 사용량을 늘리더니, “네 글 옳아”라거나 “이 집 자장면 옳아!” “너 그 안경 옳지 않아” 하면서 음식·의류·문화 콘텐츠까지로 확장했다. 신체 부위도 예외가 아니다. 단골인 한 남자에게 그랬다. “너 젖(가슴) 옳아!” 그 옳은 부위의 소유자는 “이거 최소한 1천만원짜린데”라고 해놓고는(그는 변호사였다), 소송을 내기는커녕 뿌듯한 속내를 감추지 못하고 헤죽헤죽 웃었다.
그 여자? 지금 서울 인사동에서 ‘소설’이라는 카페를 운영하는 염기정(49)이다. 내가 만나 술 마신 사람들 얘기를 하면 우리 시대와 문화가 담기지 않을까 해서, 아울러 취재나 공부 안 하고 쓸 아이템를 찾아 이 난을 시작하면서 바로 떠오른 게 그다.
내가 20대 후반이던 1991년에, 이화여대 후문에 ‘볼쇼이’라는 카페가 있었다(지금은 주유소가 들어섰다). 거기서 염기정을 만났다. 그 뒤로, 염기정은 기차역 신촌역에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인사동에 ‘소설’, 일산에 ‘그 나무’, 다시 인사동에 ‘소설’, 중간에 겸업으로 1년쯤 제주시의 ‘소설’ 등지로 옮겨다녔다. 그 18년을 빠지지 않고 졸졸 따라다니며 술 마신 나는 염기정과 술집 주인·손님을 떠나 막역한 술친구가 돼버렸다. 그런 인간들이 꽤 많다. 건축가 누구, 영화제작자 누구, 인사동에서 공방 하는 누구누구, 변호사, 영화감독, 소설가, 기자, 백수….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이 한국식 ‘백화제방’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말도 많이 하고, 사람들 만나면 반갑고, 아무 노래나 좋았던 시절. 볼쇼이의 위치가 후미졌음에도 문화계 인사와 기자들이 가지에 가지를 치며 손님 폭을 넓혔다. 인사동 ‘소설’을 차린 90년대 중반엔, 인사동 ‘평화만들기’(당시 주인 이혜림)와 함께 두 술집이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각계에서 이름깨나 날리는 이들이 모두 몰렸고, 그곳에 가면 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처음엔 두 집의 손님군이 거의 같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평화만들기엔 기자, 정치인, 운동단체 관계자들로, 소설엔 영화인, 기타 문화계 인사, 백수들로 조금씩 갈렸다. 쉽게 말해 평화만들기엔 ‘꼰대’들이, 소설엔 ‘날라리’들이 진을 쳤다. 폭력 사태가 벌어져도 양상이 달랐다. 평화만들기에선 좌파 신문사와 우파 신문사의 기자들이 싸운 반면, 소설은 워낙 시끄럽게 춤추고 노래해서 인근의 ‘과격한’ 주민이 열받아 칼 들고 들이닥치는 식이었다.
소설의 문화는 날라리 손님들과, ‘옳아’ ‘옳지 않아’를 따지는 주인이 빚어내는 일종의 폭탄주다. 염기정식 ‘옳지 않아’를 사람에 적용해보면 이렇다. 남에게 해코지하며 술주정하는 ‘주사파’는 물론이고, 술 마시면서 자기 얘기만 하거나, 손님 중 유명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아는 척하거나…. 나아가 허풍 떨거나 거드름 피우는 모습을 간파해내는 그의 촉수는 날카롭기까지 하다. 이 중 주사파에겐 술집 주인이 뭐라 그럴 수 있지만 나머지에게 관여하는 건 월권일 수도 있다. 그래서 심심찮게 주인과 손님의 다툼이 생기고, 1년에 두 번 이상은 염기정 입에서 “너 우리 집 오지 마!”라는 말이 나오는 걸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염기정은 평화롭고 낙천적이며 놀기 좋아한다. 되레 그게 지나쳐서 탈이다. 그가 손님에게 ‘관여’할 땐, 대체로 그 손님이 다른 손님들 인상을 찌푸리게 했을 경우다. 염기정은 옳고 옳지 않음의 판단 기준에 대해 반성도 자주 한다. “나 그때 옳지 않았지?”(반성할 때도 표현은 마찬가지다.) 손님들과 어울려 술 취해 행복해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가끔 신기할 때가 있다. 저렇게 좋을까? 아마도 그는 사람 좋아하는 마음을 신뢰의 수준으로 끌어올리지 않고는 못 견디는 모양이다. 담담해질 나이가 됐는데 아직도 옳고 옳지 않음을 따지고, 곧잘 울고, 집에 가려는 단골을 붙잡고 술 마신다. 결코 노회해지지 못할 여자가 아마도 염기정 아닐까.
술집 주인으로서 염기정의 결정적 단점은 다른 데 있다. 술 안 취했을 땐 가끔, 술 취했을 땐 반드시 손님이 다 알아서 해야 한다. 잔 나르고, 술 나르고, 음악 틀고, 계산하고…. 염기정이 제주시의 ‘소설’에 1년쯤 가 있다가 돌아온 날, 나를 포함한 단골들은 게으른 주인의 압제에 항거해 일제히 구호를 외쳤다. “우리도 손님이다, 훌라훌라.” 그때 염기정의 표정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옳은 자여! 술 갖다 마셔라!”
임범 애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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