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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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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혁명보다 섹스

등록 2008-05-16 00:00 수정 2020-05-03 04:25

낯선 중국 근현대 작가들을 음미하는 기회, 웅진지식하우스의 ‘중국 당대문학 걸작선’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소설 시장이 시들하다. 몇 년째 상종가를 치던 일본 소설마저 매물이 줄어든 모양새다. 하루키와 류를 제치고 현해탄을 넘어오던 일본 신세대 작가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그래서인지 최근 중국 소설 출간이 늘어나는 추세는 출판사들의 고뇌를 떠올리게 한다.

섹스를 통해 깨달은 혁명

당연한 이야기지만 한국에서 중국 소설은 문화혁명 이후의 작가들, 특히 위화, 쑤퉁, 모옌 등을 중심으로 소개돼왔다. 올해부터는 이들을 벗어나 ‘알려지지 않은’ 중국 현대작가들이 소개되고 있다. 웅진지식하우스는 5월부터 ‘중국 당대문학 걸작선’을 내놓기 시작했다(일반적으로 중국의 ‘당대문학’이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즉 사회주의 체제가 수립된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문학을 말한다). 일단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1만원)와 (예자오옌 지음, 조성웅 옮김, 1만1천원)가 나왔고 한동, 왕강, 판샤오칭, 마위웬, 류전원 등의 작품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출판사 쪽은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 위주로 선별했다고 밝혔다.

는 2005년 광저우의 문예지 에 발표된 직후 중국 당국에서 판금 조처를 당하며 유명해진 책이다. 중국 문단에 꽤 큰 충격을 몰고 왔는데, 문화혁명을 과장된 언어로 비꼬는 ‘괴탄문학’의 대표작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소설의 내용은 판금당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다. 마오쩌둥의 명언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가 성애의 최음제 역할을 하는 아이러니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혁명기에 인민해방군의 모범 병사 우다왕은 사단장 사택에서 취사를 맡는 공무분대장으로 임명된다. 이 자리는 우다왕에겐 간부가 되는 출세의 사다리다. 그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라는 신조를 철썩같이 받들고 마오 주석의 어록을 줄줄이 외우며 사단장을 위해 일하는 것이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길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 가지 방해물만 없었다면 우다왕은 계속 이 길을 걸어갔을 것이다. 그가 채소를 따거나 계란탕을 끓일 때 땀에 젖은 등을 은밀히 쳐다보는 사단장의 젊은 아내, 류렌만 없었다면.

류렌은 우다왕에게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라는 글이 적힌 팻말이 식탁이 아닌 다른 곳에 놓여 있으면, 침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오라고 명령한다. 팻말이 계단 아래에 올려져 있던 날, 우다왕은 얇은 잠옷이 바람에 날릴 때마다 드러나는 눈부신 허벅지의 기습을 받는다. 이때부터 우다왕은 류렌에 끌리는 자신의 본능을 혁명 의지로 이겨보려는 승률 제로의 전쟁을 시작한다. 마침내 류렌이 자신을 사단장 막사에서 내치려는 날 밤, 우다왕은 류렌의 아름다운 몸을 끌어안는다. 용서받지 못할 두 연인은 사단장이 베이징에 가 있는 동안 모든 문을 잠그고 알몸으로 섹스를 거듭하며, 마오의 모든 ‘성물’을 때려부수는 기행을 벌이게 된다.

홍보 카피처럼 보다 위험하고 보다 매혹적인지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이 소설은 무척 재미있다. 작가는 혁명의 구호를 성애의 구호로 타락시키면서 그것이 얼마나 텅 빈 기호인지를 폭로한다. 혁명은 시대의 가해 행위였다. 우다왕이 매일처럼 외우고 다닌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중국 민중의 빈곤과 계급 문제를 은폐하고 있다. 우다왕이 혁명을 믿는 이유는 숭고한 대의 때문이 아니라 밥과 출세 때문이었다. 그는 사랑을 통해 이 진실을 발견한다. 혁명의 시간은 지독한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옌롄커는 ‘한국 독자들께 보내는 편지’에서 “(이 소설은) 저의 창작에서 그렇게 돌출된 위치를 차지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운명 때문에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 놓이고 말았습니다”라고 말한다. 인상적인 고백이다.

는 1980년대 중반에 등단한 예자오옌의 중·단편을 묶었다. 알려진 대로 1980년대는 중국 문학이 문화혁명의 잔해를 헤치고 도약하던 시대다. 문화혁명 이후의 소설은 혁명의 상처를 핥는 것부터 시작한다. ‘상흔 문학’과 ‘되돌아보기 문학’(반사문학)이 그것이다. 이어 서구 모더니즘의 영향 아래 과감한 형식 실험을 시도하는 ‘선봉문학’이 등장했다. 한국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위화와 쑤퉁의 출발점도 선봉문학이다. 선봉문학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주로 개인의 일상을 냉정하게 묘사하는 ‘신사실주의’도 나타났다. 예자오옌의 소설들을 통해 신사실주의 소설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표제작 ‘화장실에 관하여’는 블랙 유머가 돋보인다. 고등학교(중학)를 졸업하고 하방해 공장에 들어간 것으로 보이는 화자. 같은 공장에 양하이링이라는 어여쁜 아가씨가 들어온다. 어느 날 그녀는 동료들과 상하이 연수에 나선다. 연수 마지막날 상하이 시내를 구경하던 어여쁜 양하이링은 심한 요의를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인심 나쁜 상하이에선 화장실을 찾기가 힘들다. 처음엔 말하기조차 부끄러워하던 그녀는 미친 듯 “화장실이 어딨어요, 어딨나구요!”라고 소리지르는 ‘수위’에까지 이르고 만다. 결국 그녀의 바지 한 부분에서 조금씩 물이 떨어진다.

이 사건은 양하이링에게 일생의 수치요 상처였다. 그때, 공농병 대학생(대학에 뽑힌 농민과 노동자 자녀들) 시대는 가고 대학 입시가 부활했다(1977년). 양하이링은 미친 듯 공부해 대학에 합격한다. 화자도 이 시기 그녀와 같이 공부해 대학에 들어간다. 양하이링이 대학에 간 이유가 촌뜨기에겐 소변마저 허락하지 않는 중국 대도시의 화장실 때문이었다면, 화자가 대학에 간 이유는 전혀 다른 화장실 때문이다.

중국 현대사와 화장실의 관계

문화혁명이 가장 치열했던 시절, 원래 지식인이던 화자의 부모는 우파로 몰렸다. 그들은 매일 화장실 청소를 하고 자백서를 써야 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자신이 청소한 화장실 한 곳이 깨끗하지 못하다는 호통을 듣고 달려간다. 그런데 똥통에서 금빛 찬란하게 빛나는 달걀을 발견한다. 아버지가 막대기로 힘껏 밀자 달걀은 데굴데굴 굴러서 여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한 여성 간부가 일을 보다가 자신의 오줌이 달걀을 때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뛰쳐나왔다. 누군가 “해방 이전, 우리 빈민들은 배불리 먹지 못했다. 이는 계급투쟁의 새로운 방향이다!”라고 썼다. 계급의 적을 찾지는 못했으나 결국 사람들이 달걀을 조사하기 위해 맛을 보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화자가 기를 쓰고 대학에 입학한 것은 우파의 자식이었기 때문이다.

예자오옌은 화장실을 통해 문화혁명의 일상과 그 이후의 일상을 들여다본다. 이 소설집에 실린 ‘연가’는 어느 중산층 부부의 파경을 가만히 관찰하고 있고, ‘추월루’와 ‘대추나무 이야기’는 세계대전과 내전으로 점철된 역사를 개인의 삶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다시, 옌롄커의 소설 첫머리. “삶의 수많은 진실들은 소설이라는 방식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다.” 허구라는 교량을 통해 우리는 진실을 발견한다. 중국 소설은 다른 질감의 고통과 절망을 보여준다. 문화혁명의 상처, 톈안먼에서 목도한 이상의 붕괴, 자본주의와 빈곤, 애국주의로 결탁한 국가와 자본, 그리고 삶. 중국 소설은 우리가 거쳐 지나간, 혹은 한 번도 도달하지 않은 역사의 대지에서 자신의 향기를 뿜고 있다. 그것을 음미하는 건 침향을 맡는 것보다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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