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 거대 기업집단의 실상을 폭로하는 … 맨 뒷장에서 삼성을 확인해보라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벌써 1년을 훌쩍 넘겼다.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빛나는 투쟁’이 시작된 뒤로, 뉴코아 아울렛에 가지 않는다. 가끔씩 차창 밖으로 마주치는 그곳은 여전히 번잡스레 성업 중이다. 조금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랜드 노동자들의 투쟁은 2008년 5월1일, 제118주년 세계 노동절에도 계속됐다.
세계화 시대, 다국적 거대기업은 우리 삶의 길목마다 화사한 얼굴로 웃고 있다. 청바지는 갭이나 리바이스 정도는 입어줘야 하고, 운동화는 나이키나 리복, 아디다스 정도는 신어줘야 한다. 월마트가 한국에서 철수한 게 안타깝지만, 마트에 가면 네슬레와 델몬트, 돌 푸드의 로고를 쉽게 마주할 수 있다. 코카콜라나 맥도널드, 월트디즈니의 영화를 새삼 거론할 필요는 없겠다. 다임러크라이슬러와 포드, 제너럴모터스의 자동차가 쇼윈도에서 유혹하기 시작한 것도 이미 오래다.
브랜드의 허울을 벗겨내라
미쓰비시는 자동차나 중장비보다, 니콘 카메라로 더욱 친근하다. 바이엘·글락소스미스클라인·베링거인겔하임·화이자의 약을 처방받는 우리는 트라이엄프 속옷을 입고, 아이들에게 마텔의 장난감과 치코 아동복을 안긴다. 돈이 좀 들긴 하지만, 기분은 좋다. 최고의 브랜드, 만족감은 배가된다. 그런데 잠깐, 행복한 소비의 빈틈을 비집고 불편한 단어의 조합이 끼어든다. ‘임금착취, 열악한 노동환경, 어린이 노동, 내전조장, 환경파괴, 동물학대….’
오스트리아 출신 독립 언론인 한스 바이스와 클라우스 베르너가 쓴 (손주희 옮김·프로메테우스출판사 펴냄)는 그래서 불편한 책이다. 흠모해 마지않는 거대 기업집단(콘체른)의 추악한 실체를 땀내 나는 취재로 폭로하고, 뒷짐지고 물러나 있는 이들에게 실천을 전제로 한 ‘소비자 운동 매뉴얼’을 막무가내로 들이민다. 지난 2001년 9월 초판 출간 당시 글쓴이들은 서문에서 “이 책을 읽고 나면 분통이 터지게 될 것”이라고 썼다. 맞는 말이다.
멀리 갈 것 없다. 우리의 처지를 둘러보자. ‘3류’라 불린 정치권은 ‘그러려니’다. 법과 원칙을 따라야 할 경찰과 검찰, 법조항 하나하나의 해석에 충실해야 할 사법부조차 ‘경제 살리기’에 오로지한다. 대통령부터 말단 공무원까지 ‘비즈니스 프렌들리’하니, 아무렴, ‘경제만 살리면 그만’인 세상이다. ‘경제에 기여한 공로’는 지고지선의 위법성 조각사유다. ‘쇄신’과 ‘사회공헌’의 약속만 한다면, 다시 등 두드려가며 잠시 떨어뜨린 해외시장 개척의 봇짐을 쥐어준다. 할 일 그리도 많은 ‘그분’, 하릴없이 발목이나 잡을 일이 아니다. ‘경제를 살리자’는데…. 을 읽으며, 두 번째 분통이 터지는 이유다.
“세계적으로 1200만 명의 어린이들이 저가 수출품 생산공장에서 착취당하고 있다. 그리고 대부호 360명은 극빈자 25억 명의 전 재산을 다 합한 것만큼이나 부유하다. 매년 그들이 자신의 재산 중 1%만 세상에 환원해도 가난한 사람들의 식수와 학비를 해결할 수 있다. 세계 인구의 0.05%에 불과한 500대 거대 기업집단이 세계 국민총생산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세계무역의 70%를 좌우하고 있다. 매년 1천만 명의 어린이들이 약값이 없어 병들어 죽어가고 기아와 착취로 인해 매일 10만 명의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애써 외면한대도, 낯익은 현실이다. 세계화의 현실은, 기실 참혹하다. 부당한 자원분배로 매일이다시피 대량살인이 자행된다. 무역과 자본의 무질서한 흐름을 이끌어낸 탓에, 분쟁과 테러의 세계화만 앞당겨놨다. 글쓴이들은 “삶의 질을 높이고 자유와 개인적인 발전의 기회 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 전제조건부터 세계화해야 한다”며 “지금 당장 전 인류의 공생을 위한 공정한 규정들을 가장 우선적으로 세계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동의할 수밖에.
“오늘날 유럽에서는 기업들이, 특히 노동조합의 노동쟁의와 환경운동 시위 때문에 남반구 쪽의 나라들이나 미국 같은 나라보다 훨씬 더 엄격한 생태학적·사회적 의무를 준수해야만 한다. 그러다 보니 최근 20년 사이에 관련 기준이 좀더 낮은 지역으로 생산지를 옮기는 회사들이 많아졌다. 결국 우리의 환경문제는 빈곤국가로 수출됐고, 동시에 이곳(유럽)은 대량해고 통지와 사회적 권리의 회복 요구와 같은 국면에 맞닥뜨리게 됐다.”
세계로 뻗어나간 ‘자본’은 무소불위의 힘을 키웠고, ‘원산지’로 돌아와 새로운 위력을 선보였다. “(유럽 각국) 정부는 ‘입지 유지’를 구실로 정치적 성향에 관계없이, 아주 기꺼이 사회적·민주적·생태적 기준을 완화할 각오가 돼 있었다. 그리하여 국경을 넘나드는 자유시장경제는 민주적으로 형성된 정치적 결정이나 법률보다 더욱 훌륭하게 ‘인류의 공존’을 조정한다는 믿음이 기존 정당들의 이념적 성향을 초월해 손쉽게 관철됐다.” 툭하면 나오는 소리,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어떻게 맞설 것인가? 글쓴이들이 선택한 ‘무기’는 자못 치명적이다. 거대 기업집단이 가장 아끼는 것, 바로 그들의 브랜드를 직접 겨냥한다. 왜? “전적으로 실용적인 이유”에서란다. ‘파렴치한 회사’도 수십억원대의 광고로 일궈낸 브랜드 이미지의 힘이 있다. 때로 모던하고 사회적이며, 때로 운동경기처럼 건전하고 정정당당해 보인다. 어린이를 사랑하고 가정을 보호하며, 다문화를 지향하고 여성을 존중한다. 환경과 인류의 미래까지 염려하는 모습으로 비쳐진다면 금상첨화일 게다. 그 허울을 벗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글쓴이들은 “거대 기업들의 힘은 소비자에게서 얻은 것”이라고, 그러니 “그 점을 이용하라”고 부추긴다. “우리가 영향력을 갖기 위해선 소비자로서, 특히 시민으로서 우리의 힘을 이용할 줄 알아야 하고 또한 이용해야 한다”는 게다. 그렇다고 ‘절대 도덕률’을 강요하는 건 아니다. 삶의 질을 포기하더라도 생활방식을 아예 바꾸라고 몰아붙이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한 걸음 내디뎌보라고 설득”할 뿐이다. “아무리 설명해도 수긍할 리 없는 사람 다섯 명을 설득하는 것보다, 가급적 많은 사람이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내딛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그럼, 즐거운 쇼핑 되시길
책의 정수는 340쪽부터 445쪽까지 실려 있는 ‘기업들의 실상’이다. 업종별로 추려진 50개 거대 기업집단의 ‘실상’이 두 쪽 분량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오롯이 담긴 해당 회사의 현황과 문제점, 그리고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쉽게 한눈에 들어온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388쪽에서 낯익은 얼굴도 만날 수 있다. “인재와 기술을 바탕으로 최고의 제품과 서비스를 창출하여 인류사회에 공헌한다”는 기업, 대한민국 서울에 본사를 둔 ‘또 하나의 가족’ 삼성이다. 삼성 쪽이 멕시코에서 여성 노동자들을 상대로 불법 임신테스트를 해 임신한 경우 채용을 하지 않았다거나, 내전의 참화에 휩싸인 콩고 무장반군의 돈줄인 탄탈 불법 수입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는 얘기가 눈길을 끈다. 희귀 광물인 탄탈은 휴대전화 부품에 사용된단다.
글쓴이들은 말한다. “책에서 나이키나 아디다스를 거명했다고 해서 아식스나 브룩스, 필라, 뉴밸런스, 퓨마 등의 기업이 더 낫다는 뜻이 아니다. 제외된 기업들은 단지 지면을 통해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행운을 얻었을 뿐이다.” 책을 읽어내려가다 보면 ‘살 만한 게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어쩌면 이 책은 백화점이나 마트로 향하는 이들이 필참해야 할 ‘반쇼핑 가이드’라 부를 수도 있겠다. 그럼, 즐거운 쇼핑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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