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끄러움이 중시되는 시대, 깜빡이는 여성들

제28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인 예멘 영화 ‘정거장’의 한 장면. 영화제 누리집 갈무리
‘또 다른 에프(F)를 상상해봐!’
영화(Film)를 통해 연대(Fellowship)를 만들어가는 축제(Festival)인 ‘제28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2026년 8월20일부터 26일까지 서울 메가박스 신촌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다. 올해는 33개국 121편의 영화가 관객과 만난다. 2025년에 이어 ‘F를 상상하다’라는 슬로건 아래 알파벳 ‘F’로 시작하는 단어들을 보태 영화제의 의미를 확장했다. 그중 핵심어는 ‘깜박임’(Flicker). “매끄러움과 흠결 없음이 중시되는 기술 중심 시대에 깜빡임은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이자 실패(Failure)할 수 있는 자유(Freedom)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것이 황혜림 집행위원장의 설명이다.
영화제 전후로 여성 감독·제작자·평론가 등을 초청해서 여는 ‘씨네 페미니즘’ 학교에서도 주된 논의 주제가 디지털과 인공지능(AI)이었을 만큼 기술시대를 여성의 관점으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는 주요한 화두다. 올해 영화제에는 ‘쟁점: 디지털 성정치학, 전환적 사유’ 섹션이 마련됐다. “기술이 만들어내는 일상, 노동, 관계, 사회구조 변화와 그를 둘러싼 질문을 다각도에서 사유하며, 과학기술의 발전을 둘러싼 신화적 서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장을 만들겠다”는 게 영화제 쪽의 설명이다.

제28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기술시대를 여성의 관점으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가 큰 화두다. ‘쟁점: 디지털 성정치학, 전환적 사유’ 섹션에서 선보이는 다큐멘터리영화 ‘보이지 않는 설계자’. 영화제 누리집 갈무리
먼저 성실하고 끈질긴 탐구자의 자세로 인공지능의 숨겨진 역사를 파헤치는 ‘보이지 않는 설계자’가 눈에 띈다. 이 영화는 인공지능을 중립적·객관적 알고리즘 집합이라는 통념이 아닌 인종차별, 여성혐오, 우생학 그리고 공고한 권력 구조 속에서 형성된 기술로 조명한다. ‘휴먼 인 더 루프’는 데이터 레이블러로 일하는 인도 원주민 여성 네흐마의 이야기를 통해 글로벌 기술산업 이면의 보이지 않는 노동을 성찰한다. 이 밖에 알고리즘 기술이 어떻게 인간의 감정과 의심의 정치에 연루되는지 탐구하는 ‘월컴 투 셋’, 10대 사이에 깊이 스며든 딥페이크(허위영상물)와 인간의 대상화 문제를 다룬 ‘재민이’, 불법촬영에서 시작돼 딥페이크 범죄로 이어지는 디지털성폭력 문제를 다룬 ‘내 픽셀을 청소해줘’ 등 단편영화 7편도 선보인다. 손시내 프로그래머는 “기술 발전에 따른 현실 변화를 기민하게 반영할 수 있는 단편이 많이 출품됐는데, 시각이 신선하고 자유로우며 미학적으로도 뛰어나 선별에 애를 먹었다”고 소개했다.

제28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기술시대를 여성의 관점으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가 큰 화두다. ‘쟁점: 디지털 성정치학, 전환적 사유’ 섹션에서 선보인 단편영화 ‘내 픽셀을 청소해줘’의 한 장면. 영화제 누리집 갈무리
국내에서 접하기 쉽지 않은 국가와 지역의 여성영화도 찾아온다. 특히 분쟁지역의 현실을 여성의 눈으로 새롭게 담아낸 작품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개막작이기도 한 ‘정거장’은 내전이 격화하는 예멘에서 ‘남자 금지, 무기 금지, 정치 금지’를 내걸고 주유소를 운영하는 라일과 그곳을 오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의 참상과 여성들의 회복력을 함께 그려낸다. 2026년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경쟁 부문에 초청된 바 있는 사라 이스하크 감독의 첫 번째 장편 극영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과정에서 벌어진 성폭력과 고문에 대한 증언을 기록한 ‘흔적들’, 1990년대 말 코소보 민족 갈등 속 소녀들의 성장담을 그린 ‘두아’, 체첸 전쟁을 어린 소녀의 시선에서 그린 ‘짧은 여름’, 할머니와 손녀까지 3대가 메카 순례를 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히즈라’ 등도 눈여겨볼 만하다. 송효정 프로그래머는 “파키스탄, 몽골, 코소보같이 다소 낯선 나라는 물론 사우디아라비아나 예멘 등 여성감독의 활동이나 여성영화 제작이 쉽지 않은 아랍 국가 영화가 다수 출품된 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짚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과정에서 벌어진 성폭력과 고문에 대한 증언을 기록한 영화 ‘흔적들’. 영화제 누리집 갈무리
‘미치거나 나쁘거나: 악녀의 사회학’은 더운 여름을 식혀줄 특별전이다. 신화나 고전부터 누아르·스릴러·호러 영화 등을 통해 악녀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변주됐는지를 살펴본다. 이경미 감독의 ‘미쓰 홍당무’, 워쇼스키 자매의 ‘바운드’를 비롯해 ‘카르멘’ ‘메데아’ 등 고전에 이르기까지 두루 상영된다. 마녀, 나쁜 엄마, 팜파탈 등 이른바 ‘나쁜 여자’가 새롭게 해석되는 흐름을 통해 여성의 욕망, 주체성, 권력, 모성 등을 둘러싼 사회적 규범을 읽어낸다.
이 밖에 2025년 별세한 배우 겸 제작자 김지미의 작품을 회고하는 ‘김지미, 모순과 혁신의 초상’도 마련됐다. 한국 영화사의 젠더 모순 속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한 김지미의 출연작 ‘불나비’ ‘육체의 약속’ ‘티켓’ 등이 상영된다. 젊은 관객의 관심이 집중된 ‘Re:Discover 큐레이션’은 빠른 예매가 필수다. ‘혼모노’ ‘두고 온 여름’의 성해나 작가와 ‘저주토끼’로 2022년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정보라 작가가 출동한다. 성 작가는 ‘레이첼, 결혼하다’를, 정 작가는 공포영화 ‘셔터’를 선택해 관객과 함께 각 작품을 동시대 맥락에서 다시 발견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갖는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한겨레21 독자들, ‘이 작품은 꼭!’
송효정 프로그래머: ‘여성영화 콜렉티브: 1980~90년대 노동과 연대의 기록’ 섹션 중 ‘순영이의 사랑 이야기’를 추천한다. 1987년 한국여성노동자회가 제작한 작품으로, 당시 현장 순회 상영을 할 때 사용됐던 슬라이드를 디지털 스캔해 복원한 버전이 최초로 공개된다. 슬라이드를 보여주며 동시에 대본을 읽어주는 방식으로 상영될 예정이다. 17살 여성노동자 순영이가 미싱사를 꿈꾸며 구로공단 의류공장에 취업해 살아가는 이야기다. 영화의 연출·기획자가 참석해 대담도 진행한다. ‘일본 여성영화, 세대와 시선’ 섹션에서 만날 수 있는 ‘가네코 후미코’도 놓쳐선 안 된다. 박열의 아내로 대한민국 독립운동을 했던 가네코 후미코의 서거 100주기인 2026년에 상영하게 돼서 뜻깊은 작품이다. 노장 하마노 사치 감독이 방한해 마스터클래스도 연다.
손시내 프로그래머: 여성영화의 확장과 가능성 모색을 위해 장·단편 프로젝트를 발굴·지원하는 영화제 창작지원 프로그램 ‘피치&캐치’의 결과물 중 다큐멘터리 ‘공순이’와 ‘착지연습’을 소개하고 싶다. ‘공순이’는 엄마의 삶과 노동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며 완성한 여성의 초상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인 엄마의 이름 자체가 공순이인데, 한국 사회에서 여공을 낮춰 부르던 이 단어가 갖는 의미를 되짚어가며 노동으로 단단하게 삶을 일궈온 엄마를 담아낸다. ‘착지연습’은 예술계 성폭력 생존자들이 각자의 속도로 치유와 회복을 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5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촬영하는 등 공을 들였다. 두 작품 모두 2025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지원 프로그램 본선에 올랐던 작품이라 의미가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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