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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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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탕과 연꽃/ 김해자

등록 2004-02-20 00:00 수정 2020-05-03 04:23

어린 시절 나는 화장실에 있는 언니들의 일기장이든 신문이든 닥치는 대로 읽는 문자중독중 환자였다. 방학이면 내 것은 이미 독파하고 언니 오빠들이 타온 교과서까지 기웃거리다 별로 재미없어 보이는 승공통일의 길이니 뭐니 하던 반공책까지 읽었으니 마르크스 레닌을 그때 다 마스터한 셈이다. 그것도 다 읽으면 미술책의 그림 설명이나 음악책 콩나물 대가리 밑의 가사까지 시처럼 읽었다. 초등학교 땐가는 소설 을 읽다 여주인공이 남편 게이조에게 무라이와의 사랑을 들키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무리 읽어도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여자의 목에 왜 빨간 흉터가 생겼으며, 그것을 보고 게이조가 어떻게 불륜의 심증을 굳히는지.

호기심을 채워주던 의 추억

나는 너무 빨리 까졌다./ … // 바른생활 책이나 월말고사 우등상보다/ 현란한 싸구려 화보가 나를 성장시켰음을 고백한다.// 부르는 소리도 없었는데/ 나는 왜 접근금지인 세상을 꿈꾸었을까./ 아무도 가보지 못한 세상/ 깊은 구멍으로만 존재하는 세상이/ 왜 내 생(生)을 상기시켰을까.// 선데이 서울,/ 내 생에 총천연색 욕망을 칠해놓고/ 그것이 어둠임을 가르쳐주었다.// 한때 내 경(經)이었던
- 황규관 중에서

머리가 굵어지면서 이라는 도색잡지는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채워주는 성과 생의 교과서가 되었다. 문자중독증 환자에게 눈만 검게 칠해 은밀한 느낌을 더해주는 야한 사진에 이름도 모던하게 ‘선데이 서울’이니 얼마나 재밌었겠는가. 여하튼 그 속엔 아직 어린 우리가 알 수 없으나 세상에 분명히 존재하는 생의 비밀들이 무진장 숨겨져 있었으니 숱한 고민남과 고민녀의 이야기들은 지금 생각해도 웃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전국교양경시대회’라는 데 뽑혀 내 독서의 수준과 방향은 하루아침에 업그레이드되었다. 학교 대표로 뽑힌 다음에는 과학실에 감금되어 ‘그리이스 로마 신화’며 ‘구약 이야기’ ‘강감찬’ 등을 읽으며 아브라함이 몇살에 죽었는지, 누가 누구를 사랑하였는지, 무슨 전투에서 누가 어떻게 이겼는지 눈감고 줄줄 읊어야 했다. 나른한 오후 한가로이 노니는 수족관의 물고기를 보며 강제로 외우던 불교 초심 이야기 속의 숱한 ‘세존께서 가라사대…’들은 지금도 생생하다.

지난해 가을 시 강의를 하던 중 느닷없이 청화 큰스님이 생각나 한참을 그분 이야기를 했다. 강의가 끝나고 어린 중생들끼리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고 돌아온 아침에야 간밤에 스님이 입적하셨다는 신문기사를 읽었다. 묘한 느낌이었다. 빛은 무심하나 세상 안 비추는 데가 없다더니 그분은 나 같은 중생에게조차 왔다 가셨구나 싶었다. 하루 한끼 공양과 장좌불와(長坐不臥) 청빈한 생활로 일관한 스님. 나는 그분을 19년 전 가을 곡성 태안사에서 처음 만났는데, 현장에 미싱사로 취업했다 지인의 조직사건에 휘말려 이른바 ‘도바리’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갈 곳 없는 중생을 먹이고 재워주며 “이승에서는 꼭 성불하라”는 법문까지 주시던 스님은 이제 고요한 정토로 가셨다.

此世他世間 이 세상 저 세상 사이
去來不相關 오고 감을 상관치 않으나
蒙恩大千界 은혜 입은 것이 대천계만큼 큰데
報恩恨世澗 은혜를 갚는 것은 작은 시내 같음을 한스러워할 뿐이네

청화 스님의 ‘정토삼부경’을 들으며…

입적 30분 전 휘갈기셨다는 이 열반송이 실린 책표지에 스님이 환하게 웃고 있다. 베푼 것도 없이 퍽이나 많이 나누어준 것처럼 억울함이 머리를 들이밀 때,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이 앞으로 가는 것 같지 않아 그만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을 때, 나는 스님이 주석한 ‘정토삼부경’을 듣는다. “세존께서 가라사대, 비록 큰 바닷물이라도 억겁의 오랜 세월을 두고 쉬지 않고 품어내면 마침내 그 바닥을 다하여 그 가운데 있는 진귀한 보배를 얻을 수 있듯이, 쉬지 않고 정진하여 도를 구하면 마침내…” 인연 따라 만나고 흩어지듯 내게 오는 책갈피 한장도 이유 없이 다가오지 않는 것 같다. 과 정토삼부경 사이에 생은 존재한다. 그 둘은 멀지 않다. 진흙탕과 연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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