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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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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 사는 인생/ 김해자

등록 2004-02-13 00:00 수정 2020-05-03 04:23

시험 준비한다고 큰소리치고 들어간 딸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 들여다보면 국어 자습서를 읽으며 웃고 있다. 물론 시험준비에 필수인 문제풀이는 안 하고 지문 밖의 자투리 글들을 보며 키득거리는 것이다. 그러니 성적은 그저 그럴 수밖에. 올해 중3이 되는 이 딸은 한번 책에 맛이 들리면 서너번은 보통이고 나 같은 열권짜리 책들은 읽고 또 읽어 스무회를 넘어가 중요한 대목은 술술 외우는 지경이다.

화선지와 묵에 엉킨 아버지

지난해 말부터 딸아이의 꼬심에 넘어가 40편짜리 비디오를 다시 빌려보게 되었는데 벌써 네 번째다. 노는 건 쉽게 전염되는 법인데 말리긴 했으나 재밌는 비디오를 사양하겠는가. 결국은 방 불을 다 끄고 극장 분위기에 들어가 웅장한 스케일에 빠져드는데 해설사가 옆에 있으니 유용하긴 하다. 원소가 연맹을 맺어 동탁을 쳐부수는 장면에서 원소와 원술이 헷갈린다 싶으면 즉시 해설이 나온다. “둘 다 사람을 못 믿는 편이고 우유부단한 단점이 있는데 동생 원술이 한술 더 뜬다.” 여포와 장비가 싸우는 부분이 나오면 또 정리해준다. “100점으로 치자면 장비가 멍청해 보여도 지능이 50은 되어 지략을 구사할 줄 아는데, 여포는 지능이 10에 무공은 98로 천하의 관우보다 좀 높다.”

이런 아이에게 이러저런 일로 밖으로 나도는 엄마보다 아빠는 중요한 토론 대상이다. 심심하면 서가를 빙 돌다 아빠가 보던 책을 눈여겨보며 무슨 책이냐고 묻는데, 어느새 찜을 해두었는지 아빠 책을 빌려다 보고는 둘이서 현대사가 어떠니 이승만이 어쩌니 격론을 벌이고 있다. 아이를 키우며 인생을 두번 사는 것 같다. 그림책과 동화책을 같이 읽으며 아이 시절을 다시 살았고, 머리가 굵어지니 제법 그럴듯한 시와 야한 얘기가 많이 나오는 니 이니를 다시 읽으며 사춘기를 두번 사는 것 같다. 아니 나를 낳아주고 키워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내 눈높이에서 지켜보며 자랐으니 인생을 세번 사는 셈인지 모른다.

아버지는 마흔여섯에 막둥이로 나를 보았다. 옛날로 치면 거의 손주뻘인 셈이다. 더욱이 간경화 수술을 하고 기적적으로 회생한 다음 자식을 얻었으니 유일하게 업어주고 무릎에 앉혀서 키웠다 한다. 철들어 내가 본 아버지의 인상은 대개가 화선지와 묵에 엉켜 있다. 하루에 백장 이백장 한문과 한시를 써대니 낫 놓고 ‘ㄱ’자 정도만 알고 자식 밥 안 굶기고 가르칠 일밖에는 관심이 없던 어머니에게 혼도 많이 났던 것 같다. 현실적으로 무능하긴 했으나 네댓살부터 한문을 배우다 일본 건너가 야학 기웃거린 게 학력의 전부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버지는 박학다식했다. 중2 땐가는 신문 시사란을 맡아 칠판에 요약정리하는 책임을 맡았는데, 한자가 많은 신문을 빨리 읽지 못하는 관계로 아버지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었다. 그때 아버지는 지구상에 붙어 있는 나라인지도 모를 만큼 작은 나라의 역사 및 최근 정치 상황까지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셨다.

“밥 안 되는 것만 좋아를 하니…”

성격 또한 유순하여 생전 큰소리나 금지조의 명령법을 구사하지 않았으며, 나직한 시조 흥얼거리는 소리로 아버지가 오시는 것을 알아챌 정도로 늘 웃으며 노래를 하고 다니셨다. 혼내지를 않으니 만만해 뵈는 아버지 방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몸이 약해 식사를 조금밖에 못하는 아버지의 꿀단지며 밤·대추 등을 축냈다. 그러다 아버지 하는 양을 보면 방 한가운데서 물구나무를 선 채 가부좌 자세로 책을 읽다 다시 한시를 쓰곤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盡人事 待天命’이라거나 ‘一村光陰 不可輕’이니 하는 권학문 조의 구절들을 족자로 만들어주시곤 했다. 덕분에 환경정리를 할 때마다 창문과 창문 사이 좁은 네 면은 별 고민 없이 넘어가곤 했다.

인생이 고단할 때 그런 천하태평 아버지와 산 어머니의 일생은 얼마나 신산스러웠을까 싶다. 책에 코 박고 있으면 공부를 하는지 소설에 빠져 있는지 구분을 못하던 어머니가 끌끌 혀를 차며 하시던 말씀도 생각난다. “꼭 지 애비 닮아 몸은 약해갖고 밥 안 되는 것만 좋아를 하니… 다 먹고 살라고 하는 짓이다.” 어떻게든 꼬셔서 한밤중에도 뭐라도 먹일 궁리를 하시던 어머니. 그러나저러나 하늘나라에서 엄마는 여전히 밥만 하고 아버지는 여전히 책만 보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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