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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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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다니는 책들/ 김해자

등록 2004-02-27 00:00 수정 2020-05-03 04:23

지하철은 길고 네모난 책이다. 그 네모 속에는 참으로 다양한 책들을 집필 중인 길쭉하고 넓적하고 동글동글하고 크고 작은 액자소설책들이 흔들리며 서 있거나 졸며 앉아 있다. 저마다 주인공일 생의 책이 진행 중인 밀실들이 스쳐가는 광장. 지금 바로 이곳에서 쓰여지는 책을 훔쳐보며 상상하고 재구성하며 읽어내기에 안성맞춤인 곳. 핸드폰을 꺼내보며 한 발로 다른 신발 뒤축을 한사코 문지르는 저 여자는 어쩌면 가구공장 10년에 빚쟁이 아내가 된 내 후배처럼 월말 카드를 막느라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중인지도 모른다.

대하소설, 그 노인의 인생사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안경테 속에 슬픈 눈빛을 감춘 저 청년은 밤새 아랫집 처녀의 문을 두드리다 우유 투입구를 부수고 난동을 피우다 참다 못한 주인에게 혼나고 쫓겨간 그 남자처럼 사랑의 몸살을 앓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살아 있는 숱한 책들을 싣고 질주하는 이 긴 책을 운전하는 기사는 터널 속으로 들어서면 누가 튀어나올지 몰라 심장이 조이는 중년의 가장인지도 모른다. 거리 또한 끝없이 이어지는 길고 긴 책이다. 저 길 어느 편에서 누군가는 첫 키스를 하고 누군가는 밤새 혼잣말로 떠들며 희미한 별빛 아래서 이별의 눈물을 토해냈으리라.

“내 야그 좀 들어봐. 내 살아온 야그를 책으로 묶으믄 열권 스무권 될 거잉께.”

대학 시절 용산역 뒤편 시장통에 있던 백원짜리 밥집에서 늘 듣던 소리다. 그 밥집의 단골손님은 점심 한끼로 하루 끼니를 몰아 채우던 지게꾼과 독거노인 그리고 집 없는 천사들이었다. 그들 중 몇몇 노인들은 한창 바쁠 때를 피해 들어와서는 자랑스럽게 백원을 내놓았다. 얻어먹는다는 생각이 안 들도록 책정한 그 동전은 된장국에 나물 김치에 서너 그릇씩 뚝딱 비우고도 제집처럼 눌러앉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들은 그 집 책임자인 젊은 수사나 반찬 만드는 아줌마한테는 못하고 설거지하고 밥 나르는 만만한 우리 봉사자들을 잡아놓고 열권 스무권짜리 대하소설을 읊어주곤 했다. 그 구전 소설이란 게 대체로 비극에 가깝고 운명의 장난 같은 클라이맥스는 많으니 슬리핑백에 야윈 몸뚱이 구겨넣을 때까지 중간중간 눈물 콧물 터지는 경우가 허다할밖에.

얼마 전 캄보디아에 다녀왔다. 침략과 내전의 단골메뉴인 폭격과 생매장으로 평균 나이 스물에 불과한 이 의 나라는 옛 앙코르 제국의 영화를 증명해주는 사원의 신비함과 거대함과 돌에 새긴 섬세한 부조들로 보는 이를 압도했다. 또 조각돌과 얼크러져 한몸이 된 천년의 나무는 자연의 파괴와 융합이라는 이중성을 보여주며 신화의 시간대로 우리를 데려가기에 충분했다. 대지의 어머니가 자식을 낳는 대로 잡아먹었다는 아버지 ‘크로노스’(시간)의 위력이여. 하지만 잊을 만하면 예술이라거나 시원의 상상력에 빠진 나를 배고픔과 전쟁이 엄존하는 현실세계로 불러내는 이들이 있었으니 국경을 넘을 때부터 머릿속에 붙어온 예닐곱살짜리 걸어다니는 책들이었다. 땡볕에 기진한 발걸음을 막아서던 까만 눈망울들은 엽서나 나무 피리나 조각품들을 내보이며 “원달러! 원달러!”를 외쳤다. 그 순간 6·25 직후 미군 트럭을 따라다니던 때 전 아이들의 “기브 미 초코렛! 기브 미 껌!” 소리가 들려왔던가. 이들 중 먼 훗날 원달러 원달러 하던 시절을 리얼하게 그릴 작가도 나오고, 굶어가며 배터지게 보던 비슈느니 시바니 하는 돌조각 덕에 지상으로 내려온 천상의 무희 압살라를 조각할 것이며, ‘라마야나’나 ‘마하바라타’ 서사시들을 재창조하는 시인도 나오리라.

삶의 무게가 책의 파고다를 이루리라

도서관이나 대형서점에 가면 그 많은 책들 앞에서 기가 죽다가도 문득 이 책들이 무슨 의미일까 싶다. 긴긴 밤 겨우 글 하나 쓰다가도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쓰는 자와 읽는 자가 만나 완전히 무용이거나 무용의 유용으로 입증되기도 하고 어쩌다 깊은 만남이 되는 경우도 있을 터인데 누가 아랴. 심심풀이 땅콩에서 섬광 같은 인연으로 마주칠 줄을. 사람은 멀티미디어로 상영되는 가장 괴롭고도 즐거운 책이 아닐까. 보이고 들릴 뿐 아니라 만지고 냄새도 맡을 수 있는. 고통이 삶을 압도해버리지만 않는다면 그 삐져나온 삶의 무게가 정녕 책의 파고다를 이루리라. 생의 욕망과 아픔이 엄연하게 걸어다니는 책 속에서 책의 향취를 맡는 자는 행복할지어라. 오늘 이 순간 살아 있는 책의 몸을 만지고 체감하는 자는 때로 고통이 동시에 기쁨이 되는 환희를 맛보리니.

☞ 이번호를 끝으로 ‘책에세이’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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